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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채윤의 비 온 뒤 무지개] 동의가 저항보다 강력한 기준이다

등록 2018-11-29 19:06수정 2018-11-30 14:50

성폭력 사건에서 피해자가 침해당하는 ‘성적자기결정권’은 헌법에 보장된 국민의 기본권이다. 그러므로 피해자에게 왜 적극 행사하지 않았냐고 물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가해자에게 타인의 성적자기결정권을 충분히 존중했는지를 물어야 한다.
한채윤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활동가

동의가 저항보다 강력한 기준이다. 특히 가해자가 동의를 제대로 구했는지 여부는 피해자가 얼마나 명시적인 저항을 했는지보다 훨씬 더 강력한 성폭력 사건의 판단 기준이 될 수 있다. 일각에서는 동의를 성폭력의 기준으로 삼을 경우, 피해자의 말 한마디에 따라 범죄자가 될 수 있다고 우려한다. 이것은 기우다. 이 문제는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가 어떤 생각으로 어떤 행동을 했는지를 중심에 두면 해결된다. 피해자에게 왜 발버둥을 치며 저항하지 않았냐고, 왜 가해자가 콘돔을 끼는 사이에 도망치지 않았냐고 묻는 대신 가해자에게 물으면 된다. 합의를 했다고 하는 그 성관계를 하기 전에 상대에게 어떤 말로 제안을 했는가, 상대가 완전히 이해하고 자발적으로 동의하는지 여부를 확신할 수 있었는가, 두 사람의 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지 고민하거나 논의한 바는 있는가 등을 말이다. 만약 쌍방 간에 명백하게 동의를 구하고 승인하는 과정으로 성관계가 이루어지는 문화가 우리 사회에 정착된다면 상대에 의해 무고를 당할 위험성은 더욱 낮아진다. 조사 기관도 피해자에게 사건 당시 ‘어떤 옷을 입었는가’를 물어 2차 가해를 하는 대신, 가해자가 동의를 얻는 과정에서 어떤 행동을 했는지 혹은 하지 않았는지에 집중하여 더 명료한 조사를 할 수 있다. 이렇게 하면 적어도 술에 취해 있던 피해자와 합의를 했다고 우기는 경우는 거의 사라질 것이다.

얼마 전 대구경북여성단체연합은 대구지방법원 서부지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비정규직으로 일하던 여성이 회식 후 만취한 상태에서 직장 상사에게 성폭력을 당한 사건에서 무죄 판결이 나왔기 때문이다. 19살 조카를 성폭행한 혐의로 기소된 39살의 외삼촌도 무죄를 받았다. 삼촌이 조카를 때리거나 위협한 사실이 없고 적극적인 저항의 표시가 없었다는 이유였다. 고등군사법원에서도 어이없는 판결이 나왔다. 해군 대위가 두명의 상관에게 성폭력 피해를 입은 사건에서 재판부는 성관계에 합의가 없었던 것은 확실한 듯하나 협박과 폭력이 동반되지 않았으므로 강간이 아니라고 첫번째 가해자인 소령에게 무죄, 오래전 일이라 피해자의 기억이 정확하지 않을 수 있다며 두번째 가해자인 대령에게도 무죄를 선고했다. 새로운 증거가 나와서가 아니라 피해자의 저항 여부와 기억력에 대한 재판부의 자의적인 의심이 10년과 8년이라는 중형을 내린 1심 선고를 뒤집은 것이다.

법원은 그동안 폭력과 협박으로 ‘피해자의 반항이 불가능하거나 현저히 곤란한 정도일 것’을 강간의 기준으로 삼았다. 그러나 칼을 휘두르고 위협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 곧 안전하고 평온한 관계를 의미하진 않는다. 위력에 의한 성폭력을 보자. 예를 들어 차기 대통령 후보로 거론되는 도지사 정도의 인물이라면 이미 존재하는 위력이 너무 대단하므로 위력이 개입되지 않는 상황을 스스로 만드는 것이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경우에 자신이 좀 더 조심을 해야 한다. 고위 공직자들이 몸가짐을 더욱 조심히 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다. 그런데도 도지사가 비서관에게 성적 접촉을 시도했다면? 비서관이 거부할 수도 있지 않냐고 하겠지만, 위력이란 저항하지 못하도록 누르는 억압이 아니라 동의 여부조차 선택하지 못하게 하는 억압이다.

성폭력 사건에서 피해자가 침해당하는 ‘성적자기결정권’은 헌법에 보장된 국민의 기본권이다. 그러므로 피해자에게 왜 적극 행사하지 않았냐고 물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가해자에게 타인의 성적자기결정권을 충분히 존중했는지를 물어야 한다. 우리는 착각하지 않아야 한다. 어떤 비서관도 업무 중에 갑작스럽게 성적 제안을 상사에게서 받을 이유가 없다. 업무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일이다. 이 부분이 동의와 거부를 하기 이전에 이미 도지사가 저지른 잘못이다. 1심 재판부가 ‘존재하기만 했을 뿐’이라고 한 위력은 바로 이때 작동했다. 상대의 동의를 구하기 위해 노심초사하며 말과 행동을 신중하게 하지 않아도 되는 것 자체가 위력의 행사다.

법은 이제 이렇게 물어야 한다. 피해자에게 저항했느냐가 아니라 가해자에게 동의를 얻었느냐고. 전 충남도지사의 성폭력 사건 2심이 시작되었다. 2심 재판부는 성폭력으로 의심되는 사건을 다룰 때 법이 어떻게 작동해야 하는가를 제대로 보여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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