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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조한욱의 서양 사람] 꽃을 든 남자

등록 2018-11-15 18:15수정 2018-11-15 19:19

조한욱
한국교원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파블로 피카소는 <꽃을 든 남자>라는 스케치를 그렸다. 터키의 시인 나짐 히크메트와 그리스의 영화감독 니코스 치마스는 그 모델이 들고 있는 꽃을 더욱 구체화해 각기 <카네이션을 든 남자>라는 시와 영화를 만들었다. 그 남자가 법정에서 자신을 변론하며 자신이 지지하는 이념을 상징하는 붉은빛의 카네이션을 들고 있었던 그리스의 독립투사 니코스 벨로기아니스였다.

아테네의 법학도였던 벨로기아니스는 공산당에 가입하였다는 이유로 퇴학을 당하고 감옥에서 고문을 당했다. 1941년 독일이 그리스를 점령한 뒤에는 나치스에게 넘겨졌다. 그는 탈옥한 뒤 그리스 인민 해방군에 가입하여 주로 유고슬라비아에서 레지스탕스 활동을 펼쳤다. 그리스가 독립한 뒤 귀국한 그는 아테네에서 공산당을 재조직하려다가 체포되어 군사법정에서 재판을 받았다. 반역 혐의의 첫번째 재판에서 사형은 면했지만, 곧 소련에 국가의 기밀을 넘겼다는 간첩 혐의로 두번째 재판을 받았다.

피고가 재판관들을 향해 부역자라고 꾸짖고 조롱했던 이 재판은 전세계의 관심을 끌었고, 피카소의 그림이 그를 ‘카네이션을 든 남자’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만들었다. “살아서 나의 신념을 배반하느니 죽어서 그것을 지키겠노라. 나는 언제나 그런 선택을 해왔고, 지금도 그 일을 하고 있을 뿐”이며 “그리스 땅이 무덤과 폐허가 된 것에 대한 책임은 외국의 제국주의자들과 그리스의 그들 하인들이 져야 한다”고 포효했던 그에게 법정은 사형을 선고했다.

일주일 이내에 전세계에서 수십만통의 전보가 날아들어 군사법정의 사형 선고를 철회하라고 촉구했다. 피카소, 사르트르, 채플린, 엘뤼아르, 히크메트 등등이 동참했다. 반면 미국은 그리스의 국왕과 정부에 사형을 집행하라고 압력을 가했다. 결국 국왕 파블로스는 국제적인 사면의 청원을 묵살했고, 1952년 3월30일 일요일 동이 틀 무렵 37살 벨로기아니스의 심장은 박동을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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