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원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독일 서남부에는 바인스베르크라고 하는 작은 도시가 있다. 와인의 산지로서 유명하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었을까? 오늘날 인구 1만명 남짓의 이 도시가 한때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자리를 다투는 사람들에 의해 벌어진 전투의 중심지였다. 그렇지만 그 전투 자체보다는 마무리 과정에서 있었다고 전해지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며 회자된다. 콘라트 3세는 호엔슈타우펜 가문 최초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에 올랐다. 당시 벨프 가문은 호엔슈타우펜 가문과 쌍벽을 이루며 최고 권력자의 자리를 두고 싸움을 벌여왔다. 벨프 4세는 자신을 지지하던 바인스베르크 주민들을 선동하여 반란을 획책했다. 그러나 콘라트 3세의 포위 전략이 성공을 거두어 결국 바인스베르크시는 항복할 수밖에 없이 내몰렸다. 당시의 관례는 승리자가 내거는 항복의 조건을 패배자들이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었다. 콘라트 3세의 조건은 여자들만은 살리겠다는 것으로, 그들이 등에 지고 나를 수 있는 만큼만을 갖고 그 도시를 떠나는 것을 허용한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바인스베르크의 그 충직한 여인들은 아들과 남편과 아버지를 등에 업었다. 황제는 그 승리의 순간에 성문 앞에 서 있었다. 승리자가 무례하게 행동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관례였지만 그는 분노를 억제했다. 권력의, 특히 황제 자리의 경쟁자에 대한 분노는 끔찍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었던 시대임에도 그것을 참은 것이다. 그의 군대는 칼과 창을 빼 들고 바인스베르크의 남자들을 모두 살해하려고 대기하고 있었는데 그들 모두가 안전하게 지나갈 수 있도록 지켜보고만 있었던 것이다. 의로운 여인들의 행동에 화답한 황제의 인간성으로 미화되고 있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사실 황제는 자신의 법에 충실했을 뿐이다. 아직 세부적으로 명문화된 법이 존재하지 않았을 때 황제의 말은 곧 법이었다. 어쨌든 비굴한 수사로 말을 바꾸는 법관들과 비교하면 여전히 아름다운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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