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원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기원전 390년 갈리아에 살던 켈트인들의 일파, 세노네스족이 북쪽으로부터 이탈리아에 침입했다. 별 저항을 받지 않고 속도를 높여 진군했던 그들은 손쉽게 점령지를 확대했기에 그들의 장군 브렌누스조차 매복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의심할 정도였다. 이윽고 로마의 외곽에서 두 군대가 마주쳤으나, 이미 군기가 저하된 로마군은 적수가 되지 못했다. 또다시 세노네스 군대는 너무도 손쉬운 승리에 놀랐다. 당시 전쟁의 관례처럼 갈리아의 이 전사들은 로마를 약탈했다. 이미 로마의 귀족들은 군대를 이끌고 인접 도시로 도피한 이후였다. 로마에 남은 자들은 소수의 그들만 살아남은 줄 알고 카피톨리노 언덕에 결집하여 자구책을 구했다. 이들의 방어가 굳건하자 갈리아의 전사들은 새벽에 습격을 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여신 유노가 보낸 거위가 로마인들을 깨워, 만리우스 카피톨리누스의 주도 아래 그 습격을 무산시켰다고 역사가 리비우스는 전한다. 결국 세노네스 군대는 물러갔다. 군사적인 승리 때문이 아니라 역병이 돌았기 때문이었다. 매장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사망자가 늘어나자 협상 끝에 그들은 되돌아갔고, 그 과정에서 벌어진 전쟁에서 쓰라린 패배를 맛봤다. 그렇지만 로마를 지킨 공로는 비참한 상황 속에서도 끝까지 저항하였던 소수의 로마인들에게 돌아가야 마땅했다. 그러나…. 돌아온 귀족들은 고리대금을 통해 그동안 입었던 손실을 복구하려 했다. 물론 그 피해자는 평민일 수밖에 없었다. 또다시 만리우스 카피톨리누스가 평민을 위해 나섰다. 빚진 자들의 빚을 갚기 위해 자신의 저택을 팔기까지 했다. 그뿐이 아니라 공금을 횡령했다고 원로원을 비난했으나, 오히려 그가 왕권을 획책하고 있다는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자신이 구했던 카피톨리노 언덕이 보이지 않는 감옥에 갇힌 뒤 1년 만에 타르페이아 바위에서 던져졌다. 오늘날 그는 로마 개혁을 위한 순교자로 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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