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원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프랑스 사람들은 대략 1885년부터 1차대전 발발까지를 “좋은 시절”이라 부른다. 평화와 번영 속에서 여유로운 생활이 무르익었지만, 그것은 사치를 과시하고 이완된 도덕감 속에 위선과 방종에 탐닉했던 시기이기도 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아방가르드, 즉 전위 예술이 탄생했는데, 에릭 사티는 음악에서 그 운동을 주도했다. 이 시기를 “향연의 해”라고 부르며 그에 대해 상세한 연구서를 집필한 문화비평가 로저 샤툭에 따르면 사티는 두 명의 완전히 다른 작곡자였다. 초창기의 그는 친한 친구 클로드 드뷔시가 성공의 길에 들어서는 것을 지켜보았고, 최초의 제자 모리스 라벨이 자신의 길을 개척해 나가는 것을 도왔으며, 그 자신은 정상에서 벗어났다고 간주되던 정도의 곡들을 작곡했다. 그러던 그가 갑자기 잠적하여 망각 속에 사라진 것 같았다. 그러던 그가 12년 뒤에 48세의 나이로 돌아왔다. 그가 재발견되며 갑자기 선구자로 치켜세워졌고, 드뷔시와 라벨에 의해 새로운 활력을 얻었다. 작곡도 다시 시작했다. 그러나 이전에 사람들의 인정을 받았던 형식에 안주하는 것을 거부하며 전적으로 새로운 영역의 문을 열었다. 출판업자들도 그의 곡들을 받아들이지 못해 창작한 지 몇 년이 지난 다음에야 작곡집이 발간되곤 했다. 그러나 그 스스로는 자신의 예술에 대해 평온하게 확신하고 있었으며, 작곡을 통해 그 예술에 대한 헌신을 증명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학생 시절 그에 대한 선생님들의 평가는 박했다. 파리 음악학교에서 피아노를 공부하던 그에 대해 에밀 드콩브는 “학교에서 가장 게으른 학생”이라고 불렀으며, 조르주 마티아스는 그의 피아노 연주 솜씨가 “무의미하게 장황하고 가치가 없다”고 혹평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티는 그의 재능이 연주보다는 작곡에 있다고 마티아스가 칭찬했다고 강변했다. 선생님의 확인되지 않은 격려조차 학생의 재능을 불러일으킨다. 5월17일은 사티의 생일이었다.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