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원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게르만족의 일파인 서고트족이 이베리아반도에 있던 카르타고의 식민지를 점령했다. 그 뒤 그 지역은 로마제국의 속주가 되었는데도 그 이름은 카르타제나라 하여 옛 역사를 보존했다. 그곳을 지배하던 총독의 급선무는 그 게르만족과 화합을 이루어 로마제국에 충성하는 국민으로 만드는 일이었다. 그를 위해서는 그들이 믿던 아리우스파의 기독교를 버리고 로마가톨릭으로 개종시켜야 할 필요가 있었다. 총독의 맏아들로 주교의 자리에 오른 세비야의 레안드로가 이베리아 최초의 문법학교를 세운 것도 그런 정치적 목적과 무관하지 않다. 그 학교에는 스무 살 이상이나 어린 동생 이시도로도 다녔다. 형은 아둔하기만 한 동생을 엄하게 대했다. 전설에 따르면 꾸중을 들은 이시도로가 낙담하여 우물가에 앉아 있는데, 물방울이 떨어져 바위에 홈을 낸 것을 보았다고 한다. 스스로 깨달았다고도 하고 어느 아낙네가 깨우쳐줬다고도 하는데, 연약한 물방울도 오랜 세월에 걸쳐 바위에 샘을 만들 수 있다는 진리에 대오각성한 그가 학업에 정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형이 사망한 뒤 주교직을 이어받은 이시도로는 대주교의 자리까지 올랐다. 그는 서고트족의 문화와 로마의 문화를 동화시킨다는 당면 과제도 충실하게 수행했지만, 훗날 사람들이 그를 기억하는 것은 학문적 업적 때문이었다. 암흑시대라 일컬어지는 중세에 살았음에도 그는 “고대 세계 최후의 학자”라고 불리며, 중세 대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발견된 것보다 600년 이상 앞서 그를 소개하기도 했다. 그의 최대의 업적은 20권에 달하는 <어원>이라는 저작인데, 자신의 시대에 알려져 있던 모든 지식을 그 어원으로 추적하여 밝히고 있다. 이를테면 최초의 백과사전인데 르네상스 시대에도 최소한 열 개 이상의 판본이 인쇄되었으니, 그 영향력은 지속적이었다. 그는 오늘날 지식의 원천으로 사람들이 꼽는 인터넷의 수호성인이 되었다. 기일 4월4일이 그의 축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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