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원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제2차 세계대전은 끝났어도 세계는 여전히 전쟁의 상황 속에 있었다. 동맹을 맺었던 미국과 소련이 각기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종주국이 되어 서로를 견제하며 냉전에 돌입했던 것이다. 특히 미국은 ‘자유세계’를 수호하는 선봉장을 자처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자유’는 ‘반공’과 거의 동의어가 되었고, 인권은 철저하게 무시되었다. 미국은 소련 세력의 확산을 막기 위해서라면 어떤 대가도 기꺼이 치르려 했다. 살라자르의 독재 포르투갈도 북대서양조약기구에 가입시켰고, 프랑코의 파시스트 스페인과도 동맹을 맺었다. 니카라과의 소모사 정권을 비롯한 중남미의 독재 정권도 비호했다. 인권을 옹호한다는 케네디 정권에서조차 과테말라, 에콰도르, 온두라스 등지에서 미국의 비호 아래 쿠데타가 일어났다. 아시아에서도 비밀경찰에 의해 유지되는 이란의 팔레비 정권과 필리핀, 인도네시아의 군사정권이 미국의 우방이 되었다. 냉전 체제를 고착시키려는 시도가 가장 추악한 모습을 드러낸 곳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이었다. 그곳의 풍부한 천연자원에 탐을 내던 서구 강대국의 지원도 있었지만, 자신의 진영 속에 남아프리카를 계속 유지하려던 미국이 인종차별정책을 고수하려던 남아프리카 정부를 지원했던 것이다. 원주민의 통행을 제한시키는 악법에 항의하던 시민 69명에게 총격을 가해 살해한 샤프빌 학살로 저항이 거세졌어도 동맹은 굳건했다. 그러나 냉전이 ‘가장 추악한’ 모습을 보인 곳이 남아프리카인 줄 알았던 나는 옳지 않았다. 그곳이 아니었다. 제주도였다. 미군정은 경찰력을 동원한 진압에서 군대를 동원한 토벌로 방향을 바꾸어 좌익을 척결한다는 명목으로 무고한 민간인을 학살했다. 공식적인 사망자만 1만4천명이 넘는데, 피해자들에게 가해진 국가의 폭력은 끈질기게 이어졌다. 4·3을 입에 담는 것마저 금기가 되었던 것이다. 철저한 진상 규명의 바탕 위에서 가해자들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 대상이 미국이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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