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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조한욱의 서양 사람] 미소 수녀

등록 2018-03-22 18:50수정 2018-03-22 19:41

조한욱
한국교원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열성적으로 걸스카우트 활동을 하던 한 소녀가 저녁의 야외 행사를 위해 처음으로 기타를 구입했다. 자라나면서는 교육을 받고 교사가 되었다. 그렇지만 어려서부터의 꿈은 수녀가 되는 것이었다. 결국 자닌 데커스는 스물여섯의 비교적 늦은 나이에 도미니크 수도회의 수녀가 되었다. 그는 수녀원에서도 노래를 만들어 불렀다. 동료 수녀들은 물론 신자들까지도 많이 좋아했다. 고참 수녀들이 레코드를 내도록 권유했다. 수녀원 방문객들에게 팔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브뤼셀의 필립스 레코드사에서 녹음한 그 노래가 국제적으로 대성공을 거두었다. 1964년 한 해에만 200만 장 남짓 팔려나갔고, 이 수녀는 저명인사가 되어 “미소 수녀”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되었다. 미국에서는 그 이름보다는 “노래하는 수녀”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삶에 느슨하게 바탕을 두고 있는 영화가 그 제목으로 나왔기 때문이다. 그 노래 ‘도미니크’는 미국에서 인기순위 1위에 오른 유일한 벨기에 노래로 남아 있다.

그러나 그러한 성공과 대중적 인기가 그로 하여금 더 많은 미소를 짓게 만들었을까? 결코 그렇지 못했다. 경제 개념이 부족해서 그랬던 것인지 레코드 판매로 인한 수입은 대부분을 레코드 회사와 제작자가 가져갔고, 그 나머지의 이익금조차 수녀원의 몫이 되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심리적인 것이었다. 에드 설리번 쇼에 모습을 보일 정도로 널리 알려지게 된 “미소 수녀”는 언제나 미소를 지어야 했다. 원장 수녀는 그가 침울한 분위기에 젖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고, 그가 만든 곡에서조차 슬픈 가사는 삭제하는 검열을 자행했다.

신앙심을 저버린 적이 없었지만 수녀원을 떠나야 했다. 떠난 뒤에도 하루에 몇 차례 기도를 하며 정결한 삶을 유지했다. 레코드사에서 원해 다시 취입했지만 “미소 수녀”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못하게 된 그를 사람들은 알지 못했다. “그의 영혼이 구름 속을 나는 것을 보았다.” 그의 묘비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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