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석 대기자
30년 가까이 끌어온 북한 핵 문제가 대단원에 접어드는 모양새다. 4월 말 남북 정상회담에 이은 5월 북-미 정상회담은 ‘끝의 시작’으로서 훌륭한 무대다. ‘시작이 반’이라는 우리 속담에 잘 어울린다.
과거 협상 때와 크게 다른 지금 상황을 마음에 새겨둬야 실패 가능성을 줄일 수 있다. 우선 정상회담이라는 큰 틀을 먼저 잡아놓고 내용을 채워가는 방식에 걸맞은 추진력과 의지가 필요하다. 북한과 미국이 함께 ‘전략적 결단’에 다가간 모습은 사실상 이번이 처음이다. 빌 클린턴 미국 정부 말기인 2000년에 북-미 수교 직전까지 갔으나, 뒷심이 약해 흐지부지됐다. 북한은 6년 뒤 첫 핵실험을 했다. 실패할 경우의 위험성은 그때보다 지금이 훨씬 크다.
최근 사태 진전에는 북한과 미국 지도자의 개인적 성향과 의도가 무시 못 할 비중을 차지한다. 20대 후반에 권력을 차지해 6년 동안 힘으로 체제를 정비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장기 집권의 여건을 만들려는 듯하다. 자칫하면 권력 기반 전체가 흔들릴 수 있는 다걸기(올인)식 도박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자신을 죄는 여러 국내 정치 난관에서 벗어나기 위한 핵심 카드의 하나로 대북 협상을 선택했다.
우연적 측면이 있는 이런 요소들을 잘 조율해 상승작용을 일으키게 하는 것은 우리 정부의 몫이다. 지금까지는 무난했다. ‘세계사적으로 극적인 변화’를 위한 필요조건이 상당 정도 충족되고 있다. 두 정상회담은 그 바탕 위에서 충분조건을 쌓아가는 자리다.
끝의 시작이 성공하려면 무엇을 경계하고 무엇에 집중할지 분명히 해야 한다. 무엇보다 신속한 진전이 중요하다. 준비 덜 된 정상회담이라는 지적이 여러 곳에서 나온다. 하지만 서로의 목표와 쟁점, 사용할 카드 등은 이미 대부분 나와 있다. 핵 폐기라는 핵심 부분에서 먼저 합의해 신뢰를 확보해야 한다. 그래야 남북한과 미국 내부의 강경파가 전면에 나설 수 없는 분위기가 만들어진다. 협상을 끌수록 그만큼 원심력도 커진다.
핵 문제에 집중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북한의 인권 또는 체제 문제 등을 함께 건드리면 모든 논의가 엉클어진다. 지난 30년을 돌아보면, 북한이 생각하는 체제 안전과 핵 개발 의지는 정확하게 반비례 관계에 있다. 북한 체제가 아무리 후진적이라도 이를 개선하고 해법을 찾는 일은 일차적으로 자신의 문제다.
핵 문제에선 북한이 밝힌 비핵화 조건인 ‘군사위협 해소와 체제안전 보장’에 논의가 모일 수밖에 없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와 관련해 ‘9·19 공동성명은 실패한 모델’이라고 한 바 있다. 9·19 성명은 ‘행동 대 행동’ 원칙을 단계적으로 정식화한 합의다. 이유가 어디에 있든 성명 내용이 잘 이행되지 않은 점에서, 또 북한이 핵실험을 하기 전인 당시와 ‘핵 무력 완성’을 선언한 지금은 판이한 상황이라는 점에서 9·19 성명 모델을 지금 그대로 쓸 수는 없다.
하지만 9·19 성명이 처음 종합적으로 제시한 비핵화의 조건과 이행 방법은 여전히 유효하다. 검증 가능한 비핵화의 평화적 달성, 북-미 및 북-일 관계 정상화, 한반도·동북아 평화체제 구축, 대북 경협 등이 그것이다. 비핵화 조처가 차변에, 다른 모든 것은 대변에 놓인다. 물론 이를 조합하는 방식과 검증·이행 절차와 속도 등은 달라져야 한다. 북한·한반도·동북아 문제 전체를 균형 있게 보고 모두의 공존공영에 기여할 새로운 내용도 요구된다.
과거 북한은 미국을 줄기차게 비난하면서도 대미 관계만 좋아지면 모든 문제가 한꺼번에 풀릴 거라는 ‘미국 편향’ 모습을 보여왔다. 그런데 경협 등 실질적 대북 관계를 주도한 것은 언제나 한국과 중국이지 미국과 일본이 아니었다. 이런 현상은 앞으로도 크게 달라지기 어렵다. 모두 명심해야 할 대목이다.
핵 문제가 큰 가닥을 잡고 나면 더 부각될 사안은 미-중 패권 대결이다. 결정적 순간에 이 문제가 발목을 잡을 수 있다. 예컨대 북한과 미국이 손잡고 중국에 맞서려 한다면 중국은 비핵화 해법과 관련한 협력을 주저할 것이다. 그래서 6자회담의 복원과 활성화가 중요하다. 정부는 북한과 미국 못잖게 중국·일본·러시아에도 외교력을 투입해야 한다.
큰 변화를 실행하면서도 끝난 뒤에야 무엇을 했는지 비로소 알게 되는 경우가 역사에서는 적잖다. 지금도 그럴지 모르지만, 끝의 시작을 잘 넘기고 그것이 끝까지 이어지도록 방향을 잡아갈 주된 책임은 우리 정부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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