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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조한욱의 서양 사람] 총기 사용의 자유?

등록 2018-03-01 17:25수정 2018-03-01 19:05

조한욱
한국교원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찰턴 헤스턴은 60여년을 영화계에 종사하면서 선이 굵은 연기로 100여 편의 작품을 남겼다. 우리에겐 연휴 때마다 방송되던 <십계>의 모세 역과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안겨준 <벤허>를 통해 주로 역사 영화에 출연했던 배우로서의 이미지가 강하다. 그렇지만 그는 <지상 최대의 쇼>와 같은 엔터테인 영화, 인디애나 존스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인 <레이더스>의 모태가 된 <잉카의 비밀> 같은 모험 영화, <악의 손길> 같은 필름 누아르, <빅 컨트리>와 같은 서부 영화는 물론 <혹성 탈출>과 같은 공상과학 영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를 섭렵했다.

영화계의 경력만큼 다채로운 것이 그의 정치적 성향이었다. 그는 1960년대에 진보적인 민주당을 지지하며 인권운동을 활발하게 펼쳤다. 인권법의 제정을 위해 1963년 워싱턴에서 말런 브랜도, 해리 벨라폰테, 시드니 푸아티에와 함께 행진 시위를 벌였던 것은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는 ‘사건’이었다. 이 당시의 헤스턴은 총기 규제를 찬성하는 정도를 넘어 홍보에 나설 정도였다.

그러던 그가 50대에 들어서면서 보수로 돌아서며 공화당 지지자로 바뀌었다.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들을 저버리고 리처드 닉슨을 도왔으며, 로널드 레이건의 보수적인 정책을 강력하게 옹호했다. 정치적 성향의 변화야 그 스스로 결정할 문제이니 왈가왈부하고 싶지 않다. 그렇지만 70대에 들어선 그는 지나치게 나아갔다. 미국 총기 협회의 회장을 다섯 번이나 역임하면서 총기 규제의 철폐를 부르짖었던 것이다. 그의 영향력에 힘입어 미국 중산층의 많은 사람들이 총기 사용의 자유를 지지하는 쪽으로 돌아섰다.

1999년 4월 콜로라도주의 콜럼바인 고등학교에서 총기 난사 사건이 일어나 13명이 사망했다. 마이클 무어가 그 참사를 다큐멘터리로 만들며 헤스턴과 인터뷰를 진행했다. 헤스턴은 변변한 대답도 하지 못하다가 마침내 카메라에 등을 돌리고 방에서 나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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