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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하종강 칼럼] 삼성 이재용 판결 때문에 하는 변명

등록 2018-02-06 17:44수정 2018-02-07 15:25

하종강
성공회대 노동아카데미 주임교수

내 머리에 줄곧 떠오르는 것은 반올림 농성장과 물이 꽁꽁 어는 추운 날씨에 그곳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재용 항소심 판결을 듣고 배신감에 가슴이 무너지는 느낌을 받은 국민이 많았을 것이다. 반올림 농성장을 지키는 사람들은 그 가슴이 무너지는 경험을 가장 많이 해본 사람들이다.

노동문제 관련 수업에서 학생들에게 학기 중 두 가지 과제물 중 하나를 선택해 제출하도록 하고 있다. 노동자를 인터뷰하고 그 내용을 신문기사 형식으로 써 보기, 또 다른 하나는 사회문제를 다루는 집회에 참석해 그 소감을 형식에 구애됨 없이 자유롭게 정리해 보기 등이다.

“노동자를 어떻게 만나나요?”라며 난감해하는 학생들에게 “우선 가족 중에서 찾아보세요”라고 하면 대개 ‘아, 그렇군요’ 하는 표정이 된다. 부모님의 삶을 눈물겨운 내용으로 정리하면서 “그동안 이렇게 어려운 환경 속에서 일하며 살아오셨다는 것을 이번에 처음으로 알게 됐다”는 과제물을 읽다가 잠시 숨을 골라야 하는 일이 학기마다 몇번씩 생긴다.

1학기 수업에서는 5월1일 ‘노동절’에 열리는 노동자대회를 추천하고, 2학기 수업에서는 전태일 열사 추모일에 맞춰 열리는 노동자대회에 참석해볼 것을 권한다. 주최 측의 주장에 반드시 동의하지 않더라도 몇만명이 모이는 집회를 한번이라도 본 사람과 그런 집회를 한번도 보지 못한 사람은 사회를 이해하는 능력에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고 유인 동기를 부여하기도 한다. 보수단체가 주최한 집회에 참석한다 해도 논리적 완결성을 갖춘 내용이면 좋은 점수를 받는 데 문제될 것은 없다.

일정을 맞출 수 없는 학생들에게는 일본 대사관 앞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와 서울 강남역 8번 출구 삼성전자 앞에 자리한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반올림’ 농성 천막을 방문하도록 추천한다.

지난 학기 학생 두 명이 수업이 끝난 뒤 다가와 머뭇거리며 말을 꺼냈다. “우리가 며칠 전 강남역 삼성전자 앞 반올림 농성장에 다녀왔는데요… 거기 계신 분이요…” 그러고는 자기들끼리 얼굴만 마주 볼 뿐 잠시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내가 재빨리 받았다. “하종강 교수는 왜 학생들만 보내고 자기는 농성장에 자주 오지 않느냐… 그런 말씀 하시죠?” 학생들이 금세 표정이 풀리며 말했다. “아, 알고 계셨군요.”

모를 리 없다. 자주 찾아가지 못해 부채감만 늘어나는 곳이 어찌 반올림 농성장뿐이랴. 따지고 보면 그러한 부채감으로 삼십여년을 살아왔거늘…. 나뿐만 아니라 70~80년대 운동권 출신들에게는 오랜 세월 그 부채감이 자신의 길을 벗어나지 못하는 무기가 됐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풀려났다는 기사가 언론을 온통 뒤덮었을 때, 내 머리에 줄곧 떠오르는 것은 반올림 농성장과 물이 꽁꽁 어는 추운 날씨에 그곳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재용 항소심 판결을 듣고 배신감에 가슴이 무너지는 느낌을 받은 국민이 많았을 것이다. 반올림 농성장을 지키는 사람들은 지금까지 그 가슴이 무너지는 경험을 가장 많이 해본 사람들이다.

‘삼성왕국’으로까지 불리는 거대한 조직을 상대로 제기한 재판에서 반올림 사람들은 그동안 몇번이나 희비쌍곡선을 그렸다. 열번의 상처를 한번의 승리로 견디기도 했다. 그 절절한 내용을 최근 반올림 상임활동가 임자운 변호사가 <한겨레> 토요판에 ‘임자운의 반도체 소송기’라는 제목으로 연재하고 있다. 읽다가 몇번이나 가슴이 멍해지고 코를 훌쩍이게 된다.

그 반올림 노숙농성이 오늘로 855일째를 맞았다. “강남역 8번 출구 삼성전자 앞에서 농성을 시작했습니다”라는 연락을 받고 찾아간 것이 불과 며칠 전 같은 느낌인데, 벌써 2년 하고도 4개월이 지났다. 오랜만에 통화를 하던 이종란 노무사가 말하다가 문득 목이 멘다. “3월6일이 벌써 황유미씨 11주기예요.” 자신이 운전하던 택시 뒷좌석에서 숨진 황유미씨의 눈을 감겨주며 “아빠가 끝까지 싸워줄게”라고 다짐한 황상기씨가 거대한 골리앗 삼성과 맞서온 지 어언 11년의 세월이 지났다.

영하의 농성장을 교대로 지키는 사람들은 천막 안에서 꽁꽁 얼어버린 생수 사진을 찍어 인터넷 게시판에 올리기도 한다. 그들 중 한 사람이 올린 글이다. “피해를 입지 않은 자가 피해를 입은 자와 똑같이 분노할 때 비로소 정의가 실현된다. ―그리스의 시인이자 입법자인 솔론의 말입니다.” 이재용 부회장의 항소심 판결에 대해 분노한 것만큼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반올림’을 대하는 삼성의 태도에도 우리들이 분노할 때 비로소 정의가 실현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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