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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조한욱의 서양 사람] 자유로운 영혼, 프리다 칼로

등록 2018-02-01 18:01수정 2018-02-01 19:30

조한욱
한국교원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재능 많고 고집 센 여자아이가 여섯 살에 소아마비에 걸렸다. 오른쪽 다리를 더 짧고 가늘게 만든 그 병으로 학교에도 가지 못했다. 그런데 집안 분위기도 별로 좋지 못했다. 부모님도 자주 병치레를 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어린 프리다 칼로가 다른 모든 재능을 물리치고 의사가 되는 꿈을 갖게 된 계기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꿈도 열여섯에 겪은 교통사고로 무산되었다. 타고 가던 버스가 전차와 부딪친 사고로 죽을 위기까지 맞았지만 살아남았다. 그렇지만 더 이상의 교육은 포기해야 했고, 그와 함께 의사의 꿈도 날아갔다. 장애와 후유증은 죽을 때까지 따라다녔지만, 덕분에(?) 취미였던 예술이 직업이 되었다. 정치에도 관심을 갖게 되어 멕시코 공산당에 가입했다. 정치 활동의 과정에서 저명한 벽화가 디에고 리베라를 만났다.

그런데 리베라는 칼로의 표현을 빌리자면 “나를 부스러뜨린 전차보다 더 끔찍한 사고”였다. 벽화 작업을 하던 리베라는 자신을 도발적으로 바라보던 21살 연하의 칼로가 자신의 아내가 될지 몰랐다고 술회했지만 그 둘은 결혼했다. 그것도 세 차례나. 리베라의 심한 여성 편력 때문에 이혼을 했어도 여전히 그를 사랑했기에 재결합하곤 했던 것이다.

아이를 원했지만 장애로 불가능했다. 대신 칼로는 예술 활동에 몰입함으로써 자신의 유산을 남겼다. 메스티소 어머니와 원주민 유모를 통해 멕시코인이라는 정체성을 확인한 그는 멕시코의 전통의상을 입고 자화상을 즐겨 그렸다. 르네상스 시대 유럽 화가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점차 더욱더 멕시코의 전통을 찾아가며 그 신화와 문명을 그림의 소재로 만들었다. 그의 멕시코는 민중의 멕시코였다.

그는 민중집회에 참가했다가 47세의 삶을 마감했다. “이 외출이 행복하기를,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기를….” 마지막 날의 일기였다. 2년 뒤 리베라는 “항상 나의 눈동자로 남을 프리다”의 초상화를 그린 후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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