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회대 노동아카데미 주임교수 “드라마 <송곳>을 보았습니다. 노조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가입하면 다 되는 줄 알았습니다. 어느 누구도 얘기해 준 사람도 없었습니다. 드라마와 비슷한 일들이 너무 많아서 불안감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매달릴 겁니다.” 7, 80년대에 봤던 노동자들의 호소문이 생각났다. 지난 9월 ‘노동과 꿈’ 홈페이지 게시판에 비공개 글이 하나 올라왔다. “지난달 설립한 노조의 지부장을 맡고 있는 사람입니다. 모두 파견 노동자들이고 대부분 젊은 여성들입니다. 16년 장기근속한 직원도 있지만 월급은 입사 일년차와 신발 한 켤레 값 차이밖에 나지 않습니다. 관리자는 원청회사에만 충성하는 사람입니다. 소통은 늘 막혀 있고 쌓이다 쌓이다 터져 버린 게 노동조합이었습니다. 노조가 생기면 다 될 줄 알았습니다. 그 반대더라구요. 변한 건 없고 오히려 죄인이 돼가는 조합원들. 노조가 왜 필요한 건지도 잘 모르는 진짜 순진하고 겁 많은 사람들입니다. 계약이 해지될 거라는 소문에 조합원들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이렇게 무너지고 싶지 않습니다. 저희에게 깨우치고 뭉칠 수 있는 기회를 주세요. 전문가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그 뒤 비슷한 내용의 긴 문자를 몇 번 더 받았다. “드라마 <송곳>을 보았습니다. 노조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가입하면 다 되는 줄 알았습니다. 어느 누구도 얘기해 준 사람도 없었습니다. 드라마와 비슷한 일들이 너무 많아서 불안감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매달릴 겁니다.” 7, 80년대에 봤던 노동자들의 호소문이 생각났다. 노조를 설립하고 한 달이 지나도록 단 한 차례의 교육도 없었다고 한다. 이런 일은 철저하게 상급단체의 책임이다. 상급단체 위원장은 회사 관리자들을 뻔질나게 만나며 뒤에서 거래하듯 일을 처리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아직도 그런 행태를 보이는 노동조합이 더러 있다. 추석 연휴가 시작되기 이틀 전, 겨우 짬이 났다. 방문하겠다고 연락했더니 “얼마나 드려야 되나요?”라고 계면쩍게 묻는다. “전혀 신경 쓰지 마시라”고 했더니 “우리 위원장님은 노조 오실 때마다 저희가 교통비를 드렸거든요”라고 한다. ‘이런 개○○’ 저절로 욕이 나왔지만 입 밖으로 내뱉지는 못했다. 같이 갈 만한 사람을 수소문했더니 연락받은 이들이 모두 선뜻 그러마 했다. “당연히 가 봐야죠”,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집행부와 상의한 뒤 연락드리겠습니다”라는 답들을 들으며 감격했다. 같은 업종 노동조합 부분회장은 “조합원들 힘내시라고 단체 티셔츠와 양말과 배지들도 준비해 볼게요”라 했고, 여성들로 구성된 다른 노동조합의 위원장은 격려금을 마련해 가겠다 했고, 노동조합에 중대한 현안 문제가 터져 부득이 동행할 수 없어 미안하다면서 추석선물과 격려금 봉투를 챙겨서 보낸 위원장도 있었다. 내가 아무런 언질도 주지 않았는데 약속이나 한 듯 모두 그렇게 했다. 교육 장소로 어렵사리 빌렸다는 강원도 한 도시 바닷가 카페에 저녁 무렵이 돼서야 도착했다. 함께 온 사람들을 소개하는 시간에 줄줄이 선물 꾸러미들을 꺼내는 동안 “민주노총은 본래 이렇게 합니다. 노동조합은 본래 이렇게 서로 돕는 겁니다”라고 설명하는데, 앞에 나와 서 있는 지부장은 벌써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 순서가 다 끝나고 주차장까지 배웅 나온 지부장이 말했다. “우리도 어서 빨리 커서 다른 조직을 도와줄 수 있는 그런 노동조합이 됐으면 좋겠어요.” 돌아오는 차 안에서 문자를 받았다. “저희 조합원들에게 너무 인상적인 잊지 못할 귀한 시간이었습니다. 먼 걸음 감사드리며 편안한 명절 보내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다음날 저녁부터 역사상 최장기라는 추석연휴가 시작됐다. 한 언론이 연휴 기간에 집에 가지 못한 채 반도체 회사에서 일하는 노동자를 소개하면서 “연휴 잊은 반도체 여전사… 산업역군 자부심”이라고 기사 제목을 뽑았다. ‘여전사’에 ‘산업역군’이라니… 지금이 7, 80년대인가? 연휴 기간 내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은 화두였다. 지부장과 계속 연락을 주고받고 있는 같은 업종 노조의 부분회장을 며칠 전에 만났다. “그날 강의 들은 조합원들이 집에 가서 얘기했더니 가족들이 대부분 ‘민주노총은 불순단체 아니냐?’고 걱정했대요. 회사에서도 뭐라 하고….” 나는 이렇게 말했다. “회사가 만일 ‘민주노총에만 가입하지 않는다면 요구사항을 다 들어 주겠다’는 식으로 나오고 노동자들이 그 요구에 응한다 해도, 결국 우리가 그 사람들에게 도움을 준 거니까 ‘만국의 노동자는 하나다’라고 마음 편히 먹읍시다.” 지금이 7, 80년대인가? 세월이 지나도 거의 바뀌지 않는 것들이 있고 누군가는 계속 그 일을 해야 한다.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