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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조한욱의 서양 사람] 자매 음악가

등록 2017-09-21 18:22수정 2017-09-21 20:27

조한욱
한국교원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르네상스 후기의 작곡가이자 성악가 줄리오 카치니는 오페라라는 장르의 기반을 닦은 선구자의 하나로 꼽힌다. 류트의 선율에 맞춰 테너로 노래 부르며 메디치 가문의 궁정이나 귀족 청중 앞에서 극적 장면을 연출하던 그의 시도가 원초적 형태의 오페라였던 셈이다. 그는 일남 이녀와 함께 무대에 서서 노래했던 음악 가족의 가장이기도 했다. 이 가족 중에서도 특히 두 딸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음악사에 더해 여성사의 맥락에서도 기억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큰딸 프란체스카는 어렸을 적부터 음악뿐 아니라 라틴어, 그리스어는 물론 문학과 수학까지 공부했다. 피렌체에서 태어나 메디치 궁정에서 노래를 부르고 음악을 가르치며 실내악과 무대 음악을 작곡했다. 한때는 궁정에서 가장 높은 급료를 받는 음악인이기도 했다. 1625년 폴란드의 왕자 라디슬라우스 시기스몬도가 피렌체에 방문한 것을 기념하여 작곡한 <알치나 섬의 루지에로의 해방>은 여성이 작곡한 최초의 오페라로 널리 인정받고 있다. 폴란드의 왕자는 바르샤바에 돌아가 이 작품의 공연을 올리라고 지시했을 정도로 이 작품을 좋아했다.

네 살 터울의 작은딸 세티미아도 17세기에 음악으로 성공적인 경력을 쌓은 여성으로 꼽힌다. 하지만 언니에 비해 덜 알려져 있고, 그것도 단지 가수로서의 예술적 재질에 대해서만 평가를 받고 있다. 세티미아가 자초한 일이었다. 그는 아직 어리다 할 수 있는 스무 살 무렵부터 베네치아의 가면무도회를 위한 곡을 필두로 작곡을 시작했다. 그렇지만 그는 만든 곡들을 대중을 위해 출판하지 않았다. 단지 개인적인 즐거움을 위해 노래를 부르려고 간직했을 뿐이었다. 사망한 뒤에야 그의 작품 하나가 인쇄되어 알려지게 되었다.

사람들은 탄식한다. 17세기에 자신의 작품을 발표하지 않고도 여성으로서 음악에서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니 그 목소리가 얼마나 환상적이었을까 확인하지 못하는 아쉬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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