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원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카리브해의 남쪽에는 퀴라소라는 작은 섬이 있다. 유럽 열강이 신항로를 개척한다며 약탈을 통한 부국강병에 나서던 시절, 오랜 항해에 시달린 선원들은 괴혈병에 걸리는 일이 많았다. 포르투갈의 선박에서 괴혈병 환자들을 이 섬에 하선시켰다. 다시 돌아오니 그들은 치유되어 있었다. 자생하는 과일 속 비타민의 도움이었을 텐데, 그들은 이곳에 ‘치유의 섬’이라는 포르투갈어 이름을 붙였고, 그것이 오늘날의 이름으로 정착했다고 한다. 자치권이 부여된 이 네덜란드의 구성국은 수도 빌렘스타트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고, 주요 산업이 관광일 정도로 아름답다. 그러나 사람들은 아름다운 산천도 피로 물들였다. ‘퀴라소’는 ‘심장’이라고도 해석될 정도로 이곳은 카리브해 교역의 중심지였는데, 물자뿐 아니라 노예까지도 사고팔았다. 그곳을 지배하던 네덜란드인들은 농장도 경영했다. 물론 농장의 노동력은 노예로 충당했고, 그들의 조건은 비참했다. 아프리카에서 포획되어 이곳에서 혹사당하던 툴라가 상황을 개선시키고자 했다. 몇 주에 걸쳐 반란을 획책한 그가 50명 정도를 이끌고 백인 농장주 앞에 나서 그들은 더 이상 노예가 아니라고 천명했다. 다른 농장의 노예들까지 동조하며 사태가 커졌고, 농장주들은 농장을 버리고 도시로 도주했다. 총독은 식민지를 수호해야 했다. 그는 해군을 동원해 진압에 나섰다. 첫 번째의 전투에서는 툴라가 승리했다. 총독부에서는 회유책을 제시했다. 그러나 이미 아이티에서 노예들이 자유를 얻은 사실을 알고 있던 툴라는 자유가 아니면 어느 것도 소용없다며 거부했다. 하지만 일시적인 승리를 거뒀다 할지라도 식민 제국의 무력 앞에 노예의 반란은 애초에 어불성설이었다. 반란군은 진압되었고, 체포된 툴라는 공개리에 고문을 받던 중 사망했다. 2013년 네덜란드에서 툴라의 반란을 다룬 영화가 나왔다. 퀴라소에서는 반란이 시작된 8월17일을 기념일로 지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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