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원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수업 시간에 딴전만 피우는 아이가 있었다. 악한 성정으로 남에게 해를 끼친 일은 없이 단지 집중을 하지 못했을 뿐인데 학교에서 퇴학당했다. 이후 그에겐 좋은 일이 생기지 않았다. 그는 고향 마을 보르도의 집집을 돌아다니며 치약을 팔거나, 조금 더 넓게는 지롱드 도의 많은 언덕을 자전거로 오르내리며 와인을 배달했다. 우체국, 경찰서, 은행, 철도 회사에 취직을 하려고 면접을 봤으나 모든 곳에서 거절당했다. 그렇게 장자크 상페가 간 곳은 열여덟이라는 나이를 속이고 들어간 군대였다. 그곳만이 숙식을 제공하는 유일한 장소였기 때문인데, 거기에서 그는 그림을 그리겠다는 마음을 굳혔다. 다른 모든 통로가 막혔기에 어쩔 수 없이 하게 된 선택이었는데, 그것도 쉬운 길은 아니었다. 보초를 서는 시간에 그림을 그리다가 적발되어 문책을 당하기도 했던 것이다. 제대한 뒤 파리로 진출하여 신문에 만평을 그리며 생계를 유지하려 했지만 역시 쉽지 않았다. 그림으로 그럴듯한 삶을 살 수 있게 된 것은 거의 15년이 걸린 일이었다고 그는 술회한다. 많은 사람들은 르네 고시니를 만나 ‘꼬마 니콜라’라는 캐릭터를 만들게 된 것이 큰 계기였다고 생각한다. 상페 역시 그것을 인정하지만, 스스로는 그것보다 이 당시 <뉴요커>라는 잡지를 접하게 되어 게재된 만평들로부터 영감을 얻은 것이 더 컸다고 말한다. 물론 이제 그의 삽화는 <뉴요커>의 표지에도 여러 차례 실렸다. <꼬마 니콜라>가 성공을 거둔 주된 이유는 어른이 아닌 어린이의 눈으로 본 최초의 어린이 세계였다는 사실에 있었다. 확실히 상페라는 인간 본인도 어린이다운 천진난만한 상상력으로 충만해 있다. 청중이 가득 찬 강당에서 사회자가 상페에게 물었다. “당신이 그린 많은 등장인물들이 색소폰을 붑니다. 왜 그렇죠?” 그는 단 한마디의 임기응변으로 사회자를 제압했다. “쉬운 질문입니다. 플루트를 불 줄 몰라서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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