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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조한욱의 서양 사람] 사슬을 끊다

등록 2017-07-06 17:45수정 2017-07-06 20:51

조한욱
한국교원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수리남은 남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작은 독립국가다. 유럽인들과 마주치기 이전에 그곳엔 다양한 원주민 부족이 살았다. 그곳에 영국인들이 최초로 식민지를 건설했다. 영국인들은 접촉했던 ‘수리넨’이라는 부족을 ‘수리남’이라 표기했고, 식민지에 흐르는 강도 ‘수리남 강’이라 명명했다. 그것이 국가의 명칭으로 정착하게 되었다고 추정한다.

이곳에 네덜란드인들도 대규모 농장을 경영하면서 두 나라 사이에 분쟁이 일어났다. 두 나라는 무력 경쟁보다는 협상을 택했다. 그 결과 네덜란드의 도시 브레다에서 조약이 체결되었다. 네덜란드가 수리남의 농장을 보유하는 대신 영국에게 네덜란드의 식민지였던 뉴암스테르담을 양도한다는 내용이었다. 그곳의 이름이 영국의 요크 공의 이름을 따 뉴욕으로 바뀌었다.

서인도회사를 통해 수리남을 지배하던 네덜란드의 농장주들은 커피, 코코아, 사탕수수, 면화 등의 재배를 위해 아프리카의 흑인들을 노예로 수입했다. 노예에 대한 처우는 가혹한 것으로 악명이 높아, 많은 노예들이 도주했다. 인접 우림에 살던 원주민들이 도주 노예들의 자립에 도움이 되었다. 그렇게 마을이 생겼고, 그곳에서 아프리카 여러 부족들의 피가 섞여 새로운 인종이 만들어졌다. 유럽인들은 이들을 ‘갈색 흑인’이라는 뜻의 ‘마론’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때로 백인들의 농장을 습격하여 무기와 식량과 새로운 동료를 약탈해왔다.

미국 남북전쟁의 여파로 네덜란드에서도 1863년 7월1일 수리남의 노예제를 폐지했다. 이날을 케티 코티라고 부른다. 수리남의 토속어로 “쇠사슬이 끊어졌다”는, 즉 노예제가 폐지되었다는 말이다. 그렇지만 노예들이 완전한 자유를 얻은 것은 또 다른 10년이 지난 1873년부터였다. 그 전까지는 최소한의 임금을 받으며 노역을 할당받았기 때문이다. 이날 많은 노예들이 농장을 떠나 수도인 파라마리보로 떠났다. 2009년부터는 네덜란드에서도 많은 도시에서 이날을 기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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