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원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아르튀르 드 고비노는 19세기에 활동했던 프랑스의 귀족이었다. 같은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에게 그는 외교관이자 소설과 여행기를 쓴 작가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그는 과학이라는 미명 아래 백인의 인종적 우수성을 증명하는 이론을 제시하여 인종주의를 합리화하려 했던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완강한 왕당파였던 그의 부친은 유서 깊은 귀족 가문 출신이었고, 어머니는 오늘날 아이티가 프랑스 왕가의 식민지였던 시절 그곳 징세관의 딸이었다. 어려서부터 엘리트주의와 인종주의의 성향을 보였던 그는 모계를 통해 자신에게 흑인의 피가 섞여 있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휩싸여 있을 정도로 피에 대한 집착이 강했다. 프랑스 혁명에 대해 적개심을 가질 만큼 시대착오적인 생각에 물들어 있던 그에겐 기사도의 황금시절이었던 중세가 가장 위대한 시기였다. 그러던 그가 1400페이지에 달하는 저서 <인류의 불평등에 관한 논고>를 출판했다. 거기에서 그는 귀족이 평민보다 우월하다는 논리를 펼쳤다. 귀족은 귀족들끼리 결혼하기 때문에 아리안족의 유전인자가 평민보다 많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주된 논지였다. 엘리트주의를 신봉하던 귀족의 자기합리화에 불과한 목소리였다. 그럼에도 이 책은 백인우월주의자들의 칭송을 받으며 신속하게 전파되었다. 미국의 의사로서 인종주의에 근거하여 노예제를 옹호한 조사이어 노트와 같은 사람들이 이 책을 영어로 번역했다. 그렇지만 미국 국민은 인종적으로 혼합되어 있기 때문에 열등하다고 서술한 부분은 번역에서 제외했다. 또한 리하르트 바그너와 같은 반유태주의자들이나 루마니아의 알렉산드루 쿠자와 같은 극우 정치가가 이 책에 열광했다. 물론 그 칭송자들의 대열에서는 이 책을 다시 출판했던 나치의 추종자들도 빼놓을 수 없었다. 한 가지만은 확실하다. 어떤 정책이건 이론이건 인물이건, 누가 추종하고 누가 반대하는가, 그것이 그 정당성의 한 가지 기준이 된다는 것이다.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