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자 트럼프발 지구촌 혼란이 현실화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일방적이고 갈등 지향적인 대외정책이 원인이다. ‘러시아 게이트’ 관련 여론 악화가 그의 돌발 행동을 부추길 가능성도 적잖다. 트럼프가 취임한 지 다섯 달이 채 되지 않았으나 부정적 파장은 넓고 깊다. 먼저 직격탄은 맞은 곳은 중동이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이집트 등 8개국이 지난주 같은 수니파 국가인 카타르에 단교선언을 한 것은 시작일 뿐이다. 무모하게도 트럼프는 이 일을 자신의 공으로 돌렸다. 카타르는 중동 지역에서 이른바 균형외교를 해온 나라다. 카타르 위성방송 <알자지라>는 ‘아랍의 봄’으로 표출된 민주화 노력을 확산하는 데 기여했다. 사우디·이집트 등은 억압적인 구질서의 보루로, 극단세력의 온상이기도 하다. 트럼프는 중동 순방에서 친사우디·반이란 노선을 분명히 했다. 그는 갈등을 해결하고 평화구조를 구축하는 데는 관심이 없다. 유럽 나라들은 이미 2차 대전 이후 국제정치의 상수이던 미국-유럽 동맹(대서양동맹)의 약화를 현실로 받아들인다. 앞으로 미국 주도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와는 별개로 독일-프랑스를 주축으로 하는 독자노선이 강해질 것이다. 이는 지구촌 공동 사안에 대한 국제공조를 어렵게 해 갈등과 분열을 심화시킬 수밖에 없다. 트럼프의 파리기후변화협정 탈퇴 선언은 이라크 침공 이후 버락 오바마 정부가 어렵게 부활시킨 미국의 소프트파워마저 허물고 있다. 미국-유럽 관계 약화와 러시아 게이트는 국제정치에서 ‘러시아 변수’를 강화하고 있다. 트럼프가 친러 태도를 보여온 배경에는 러시아의 미국 대선 ‘협력’과 트럼프 및 측근들의 경제적 이익이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트럼프가 대선 때와는 달리 중국에 대해 대체로 유화적인 태도를 보이는 건 이상하지 않다. 중국과 정면으로 부닥칠 동력이 부족한데다 얻을 수 있는 이익도 별로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북한 핵 문제는 두고두고 미국의 대중국 견제 카드가 될 것이다. 트럼프 대외정책은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우선 극도로 단기 이익에 치중한다. 트럼프는 사우디 방문에서 1100억달러(120조원) 규모의 무기 판매 계약을 따냈다. 이제까지 대외정책에서 얻어낸 최고 성과라고 할 만하다. 하지만 전략적 사고가 부족하다 보니 단기 이익 자체가 충돌하는 경우도 잇따른다. 카타르만 해도 1만명 이상의 미군이 주둔하는 요충지이자 사우디 이상으로 무기를 팔 수 있는 나라다. 국내정치적 동기가 이전 어느 정부보다 강한 것도 두드러진다. 파리협정 탈퇴는 자신의 지지 세력인 석탄·석유산업 등과 연관된다. 취임 직후 보여준 대북한 군사 공세와 최대 재래식 폭탄 아프가니스탄 투하에도 강한 지도자임을 과시해 지지율을 높이려는 의도가 짙게 깔렸다. 트럼프는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그의 개인적 성향과 이해관계가 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곧 트럼프 우선주의가 본질이다. 주요 대외정책에서 트럼프가 일을 저지르면 정부 내 주요 인사들이 물타기를 하거나 사실상 뒤집는 일이 되풀이된다. 러시아 게이트의 진전은 이런 현상을 더 심화시킬 것이다. 길게 보면 트럼프 대외정책은 미국의 국수주의적 퇴각이라는 성격을 갖는다. 그가 자리에 있는 한 지구촌의 혼란 심화와 미국의 위상 저하는 피할 수 없다. 이후 전망은 크게 둘이다. 하나는 포스트 헤게모니 시대의 정착이다. 미국 외교계의 거물로 최근 숨진 즈비그뉴 브레진스키는 세계가 지도적 중추세력이나 수호자 없이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서로 의존하는 관계가 될 것이라고 예측한 바 있다. 실제로는 이런 낙관론 대신 갈등이 일상화하는 시기가 계속되기 쉽다. 국제정치는 힘의 공백을 허용하지 않는다. 미국 수준의 초강국이 새로 등장할 가능성은 작지만 패권국가가 되려는 후보는 여럿 있다. 이들을 비롯해 새 질서에 불안감을 가진 나라는 모든 시도를 다 해보기 전엔 잘 타협하지 않는다. 동북아 상황에서 중요한 것은 평화를 향한 의지와 자신감, 치밀하고 균형 잡힌 접근이다. 트럼프 중심주의에도 흔들리지 않는 한-미 동맹의 내실화와 대중국 신뢰외교를 통해 북한 핵 문제 해결과 동북아 평화체제 구축을 함께 이뤄내기 위한 주도적 노력이 필요하다. 해방 후 ‘미국 믿지 말고 소련에 속지 말라, 일본 일어난다’라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다. 소련을 중국으로 바꾸면 지금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j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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