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원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1955년 11월 소련은 메가톤급의 수소폭탄 실험을 단행했다. 그 핵무기에는 ‘사하로프의 세 번째 생각’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그 폭탄을 설계한 핵물리학자가 안드레이 사하로프였다. 미소 양 대국이 핵무기 개발로 상대적 우위를 점하려 하던 냉전 시대에 그는 ‘사회주의 노동 영웅’의 훈장을 세 차례나 받았던 소련의 국가적 영웅이었다. 재산과 명예를 원했다면 그는 모든 것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택했던 것은 인권운동이었다. 1950년대 말부터 자신의 작업에 개재된 도덕적, 정치적 함의를 서서히 깨닫게 된 그는 핵무기 확산에 반대하는 운동의 길을 갔다. 학술원 회원으로 소비에트 체제가 지지하던 인물을 지목해 “참된 과학자들의 파면과 체포와 죽음에 대해 책임이 있는 자”라고 공개적으로 비난한 것을 필두로 그는 미국과 소련이 대륙 간 탄도 미사일을 금지하는 조약에 서명해야 할 것을 촉구하는 등 소련 정부의 심기를 건드리기 시작했다. 소련 정부는 난감한 상황에 부딪혔다. ‘노동 영웅’을 체포할 수도 없거니와, 소련의 핵무기 상황을 가장 잘 아는 과학자를 추방하는 것은 더욱 안 될 노릇이었다. 그들은 사하로프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며 그를 감시했다. 그럼에도 인권운동을 향한 그의 행보에는 거침이 없었다. 그는 모스크바에서 대표적인 반체제 인물이 되었다. 닫힌 법정의 문밖에서 밤을 새워 감시를 하기도 했고, 이백 명이 넘는 양심수의 석방을 위해 탄원서를 썼으며, 민주화의 필요성을 촉구하는 글을 지속적으로 발표했다. 소련에 인권위원회를 창립하여 국제기관과 연대하여 활동하기도 했다. 결국 소련 정부는 탄압에 나섰다. 가택 연금을 시키고 서훈을 취소하며 모든 명성을 박탈했다. 단식투쟁으로 외로운 싸움을 벌일 수밖에 없던 그에게 희소식이 날아들었다. 새롭게 정권을 잡은 고르바초프가 사면령을 내리면서 개혁의 의지를 보여주었던 것이다. 개혁의 의지는 단호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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