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파리 유전학자 집권을 예측하고 계획할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 집권 후 100일까지 구체적인 플랜이 수립되어 있었다고도 한다. 긴 겨울 광장에 모였던 민심의 지지를 바탕으로, 집권 초 과감한 개혁은 순항할 것이다. 나는 그 개혁의 진정성과 방향을 신뢰한다. 정치와 경제를 떠받치는 제도적 기틀은 확실히 방향을 바꾸게 될 것이다. 문재인 정부는 일자리를 바탕으로 사람을 공약의 중심에 둔다. 그리고 과학기술정책의 핵심은 바로 그 일자리를 만들 토대로서의 과학기술이 4차 산업혁명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한다. ‘사람 중심 과학기술’의 핵심에는 아이들이 더 이상 과학자를 꿈꾸지 않는다는 중대한 문제인식과 더불어, 과학기술 연구 현장에서 소외된 비정규직, 청년과 여성, 신규 과학기술인에 대한 지원이 놓여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과학의 날에 맞춰 내놓은 편지엔 그의 과학기술에 대한 철학이 진중하게 담겨 있다. 나는 이렇게 진일보한 국가지도자의 과학기술에 대한 철학을 읽어보지 못했고 그 진정성을 의심하지 않는다. 과학기술은 분명 국가발전의 토대다. 하지만 과학과 기술을 하나로 묶어 정책을 수립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 두 분야는 분명 다른 분야들보다 가깝게 연결되어 있지만, 호기심을 추구하는 과학과, 경제적 유용성에 초점이 맞추어진 기술을 정책의 관점에서 하나로 묶는다는 건 어려운 일이다. 박정희는 기술 중심의 경제발전정책을 정치적으로 포장하기 위해 과학을 일종의 이념으로 활용했고, 그 패러다임 아래서 한국의 과학기술정책은 경제발전의 논리에 봉사하는 도구로 전락해 왔다. 문재인 대통령의 편지에서도 과학과 기술의 혼란한 동거가 발견된다. 과학이 불확실성과의 긴 싸움이라는 인식이 드러나지만, 편지의 마지막에서는 과학기술의 성취는 일자리를 늘리는 도구라는 관점이 재등장하기 때문이다. 과학자들이 4차 산업혁명에서 거부감을 느끼는 이유는 그래서인지 모른다. 박정희 시대를 마무리하고, 정치적으로 진전한 것으로 보이는 정부에서조차, 과학기술을 경제발전의 도구로만 인식하고, 그 도구적 용도 이외에서는 과학기술의 가치를 인정하는 어떤 철학도 발견하지 못하는 현실, 바로 그 점이 과학자들이 4차 산업혁명과 창조경제의 차이를 발견하지 못하는 이유다. ‘사람 중심’이라는 단어에는 분명 희망의 단서가 있다. 하지만 그 사람 중심이라는 구호가, 국가에 더 헌신하라고 내모는 구호여선 안 된다. 과학기술자는 국가의 부품이 아니다. 분명 진일보했지만, 여전히 과학기술은 도구적으로 이해되고 있다. 다른 분야처럼 문재인 정부의 과학기술정책도 박정희 시대를 넘어서길 바란다. 방법은 하나뿐이다. 해방 이후 경제발전의 논리 속에서 부품으로 전락해버린 한국 과학기술자들을 정치적 변화의 핵심 파트너로 인정하는 것이다. 과학기술자들이 단순히 전문가로 존중받는 것이 아니라, 독일의 메르켈 총리처럼 국가지도자가 되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나라를 만드는 것이다. 과학기술자들이 우리 삶을 바꾸는 정책과 제도들의 과학적 근거에 대해 질문하고,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는 일에 나설 준비가 되었음을 인정하고, 그들을 사회 각 분야에서 일할 수 있게 만드는 것, 그래서 대한민국이 조금 더 과학적인 국가로 거듭날 수 있게 하는 것, 나는 정말 새로운 정부는 이제 그 정책의 씨앗을 펼쳐야 한다고 믿는다. 나는 문재인 대통령이 과학자를 만나 과학과 사회에 대한 깊은 대화를 나누는 광경을 보고 싶다. 어느 대통령도 하지 못했지만 그는 할 수 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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