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한혜정
글로벌 시민들에 의한 급진적 민주주의 실험은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있다. 막 시민혁명을 치른 대한민국의 시민들도 백 년의 급진을 상상하며 민주주의 실험을 이어갈 것이다. 그래서 19대 대통령 취임식은 회색빛 국민들을 무지갯빛 시민들로 소생시킨 마술의 공간 광화문 광장에서 하면 어떨까?
전철역에서 내린 시민들은 가족이나 친구와 같이, 또는 홀로 한 곳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아주 오래전 약속을 지키러 가는 사람처럼 약간은 결연하게, 약간의 설렘 속에 가고 있었다. 바람이 불었고 낙엽이 흩날리기 시작한 가을이었다. 광화문 네거리로 몰려오는 사람들은 마치 무대 위의 무용수들 같았다. 잡음 하나 없는 스피커를 통해 “사랑하는 시민 여러분…”이라는 말이 들려왔고 대열은 점점 커지고 있었다.
21세기 광화문에 신성한 신전이 열리고 있었고 그 신전은 뒤늦은 시민혁명을 완성하기 위한 신전이었다. 무수한 깃발 아래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고 서로의 차이를 반기는 시민들은 민주공화국을 만들어가는 중이었다. 시민들은 곳곳에 모여 시대 공부를 하고 자신들이 알아낸 것을 온라인 미디어를 통해 공유했다. 언제부터인가 뉴스를 보지 않게 된 사람들은 다시 뉴스를 보기 시작했고 밤늦도록 온라인 강의와 뉴스를 들었다. 그리고 매주 토요일, 시민들의 신성한 신전에 모이면서 민주공화국의 시민으로 거듭나고 있었다. 그렇게 가을을 보내고 겨울이 왔고 봄을 맞은 시민들은 불통의 대통령을 ‘왕좌’에서 물러나게 하는 시민혁명을 완수했다. 이 글이 나가는 날, 그 궐위의 자리에 앉을 새 대통령이 결정되어 있을 것이다.
내가 광화문의 기억을 새삼 꺼내는 것은 두 달 남짓 선거운동 과정에서 광화문 광장의 민주주의가 급격히 빛이 바래가고 있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표를 얻는 데 혈안이 된 후보들은 조악한 정책 상품들을 쏟아내면서 시민들을 복지의 대상으로, 정책 소비자로, 선동 가능한 존재로 전락시키고 있었다. 치열한 공학적 계산 아래 이루어지는 선거판은 민주주의를 배신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228년 전 시민혁명으로 최초의 민주공화국을 건설한 프랑스는 5월7일 대통령 선거를 치렀다. 국민은 자유와 평등을 말하는 기성 정치인들에게 등을 돌렸다. 배타적 극우 민족주의자 르펜과 39살의 신참 정치인 마크롱의 결선투표가 있었고 시민들은 정치계의 이단아 마크롱의 손을 들어주었다.
마크롱의 당선을 두고 ‘금융 기득권 세력의 승리’라고 우려를 표하는 이들이 적지 않지만 나는 그가 오만한 엘리트와 야만적 세계화와 결별을 원하는 시민들의 마음을 읽고 있다고 보고 싶다. 그는 스페인의 포데모스, 이탈리아의 5성운동과 같은 직접민주주의 운동에 영감을 받아 ‘앙마르슈’(전진)라는 이름의 단체를 만들고 청년들과 ‘위대한 행진’ 캠페인을 시작했다고 한다. 캠페인에 참여한 청년들은 전국의 가가호호를 방문하면서 다양한 국민과 만나고 인터뷰를 했다. 이를 통해 여론을 모아내는 포커스 그룹도 형성되었고 정책 수립을 위한 방대한 데이터베이스도 만들어졌다. 마크롱은 선거를 통해 대통령 자신이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 성급하게 말하기보다 국민들에게 마이크를 넘겼다. 난세의 산적한 문제를 풀기 위해 시민들의 지혜를 구하는 정치의 장을 열어가고자 하는 것이다.
광화문 시민혁명은 정치권과 시민들에게 이중의 과제를 안겨 주고 있다. 적폐 청산을 통한 정상적인 나라를 회복하는 근대적 과제와 시민들이 정책 입안자가 되어 자신의 삶과 직결된 문제들을 스스로 풀어가는 후기 근대적 과제이다. 둘 다 쉽지 않겠지만 특히 후자의 경우, 기성 정치인들의 노력으로는 이루기 힘들다. 청년 실업의 예를 들어보자. 평생직장 시대를 살았던 기존 정치가들은 계속 청년 일자리를 만들어주겠다고 말한다.
그들은 바늘구멍을 통과한 정규직 고학력 엘리트들이 우울증에 시달리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현실을 보면서도 인식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현실을 인식하는 이들이 방안을 내야 하지 않는가? 미래도 없는 직장에 들어가서 진을 빼기보다 알아서 일거리를 찾고 세상에 산적한 문제를 풀어가 보고 싶은 이들이 있다면, 국가가 할 일은 그들이 자신과 사회를 살리는 활동을 할 시간과 기본소득을 마련해주는 일이다. 미국에서는 “‘기후 변화’ 같은 것은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고 세계 정치는 끝없는 불신과 거짓말 공방전에 휘말려들고 있지만 글로벌 시민들에 의한 급진적 민주주의 실험은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있다. 막 시민혁명을 치른 대한민국의 시민들도 백 년의 급진을 상상하며 민주주의 실험을 이어갈 것이다. 그래서 19대 대통령 취임식은 회색빛 국민들을 무지갯빛 시민들로 소생시킨 마술의 공간 광화문 광장에서 하면 어떨까? 모두 태극기를 들고!
문화인류학자·연세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