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원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영국인 부부가 이탈리아를 여행하고 있었다. 17세기 후반부터 특히 북부 유럽의 귀족들 사이에서 열풍이 불었던 이른바 ‘그랜드투어’의 일환이었다. 두 딸을 낳을 정도로 긴 여정이었는데, 방문지가 무척 마음에 들었는지 출산지의 이름을 딸들에게 붙여주었다. 그 둘째딸이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이다. 르네상스의 본고향이라 말할 수 있는 피렌체의 영어 이름이 ‘플로렌스’인 것이다. 우아하고 매력적인 여성으로 자란 나이팅게일에게는 구애자들이 따랐고, 특히 정치가이자 시인이었던 한 사람과는 9년 동안 교제했지만, 결국은 청혼을 거절했다. 어렸을 적부터 소명이라고 생각했던 간호사 직분을 결혼이 방해할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그는 집안의 반대까지 무릅쓰고 간호학의 이론과 실제를 익히면서 간호사가 되었다. 그는 특히 크림(크리미아) 전쟁에서 헌신적 봉사 정신과 탁월한 능력을 보여 간호사라는 직종 자체가 명예롭게 받아들여지도록 만들었다. 실로 그것은 빅토리아 시대의 문화적 상징이 되었다. 밤마다 등불을 들고 부상병의 병상을 순회하는 그에게는 “등불을 든 여인”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영웅을 만들려는 대중의 열광에 맞춰 언론에서 그의 역할을 과장했다는 비판도 있긴 하다. 그러나 비판자들조차 나이팅게일의 이어진 행적에 대해서는 예찬한다. 그는 세계 최초로 간호학교를 만들었다. 보건의 혜택을 사회 모든 계층에게 돌아가도록 힘쓴 노력, 일터에서 여성들에게 더 좋은 노동 환경을 만들려는 시도, 여성에게만 가혹했던 매춘법을 폐지시키려던 노력 등등을 인정하여 이제 간호사가 되려는 사람들은 ‘나이팅게일 선서’를 해야 한다. 국제적으로 뛰어난 업적을 남긴 간호사에게는 ‘나이팅게일 메달’이 수여되며, 그의 생일을 기념하여 ‘국제 간호사의 날’이 제정되었다. 청문회에서 증언하였던, 그리고 그것을 감시하였던 그 육군 간호장교들도 ‘나이팅게일 선서’를 했을까? 궁금한 일들이 부쩍 많아지는 나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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