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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조한욱의 서양 사람] 4월16일

등록 2017-04-13 18:28수정 2017-04-13 20:58

조한욱
한국교원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1940년 노르웨이에서 선박회사를 경영하며 제9대 수상까지 지낸 요한 루트비히 모빙켈은 길이 146미터의 화물선 고야 호를 진수시켰다. 에스파냐의 화가 프란시스코 데 고야에게서 따온 이름이었다. 나치 독일은 노르웨이에 침공한 뒤 이 배를 나포하여 전함으로 개조하고 유보트의 보조 선박으로 사용했다. 병사나 물자를 수송하는 것이 주요 임무였다.

2차대전이 막바지에 이른 1945년 이 배는 두 척의 수행선과 함께 ‘한니발 작전’에 투입되었다. 발트 해의 고립 지역에 갇혀 있던 독일의 군사 요원과 민간인들을 귀환시키는 임무를 맡은 것이었다. 헬 반도를 돌아 발트 해를 건너 서부 독일을 향하는 이 배는 러시아의 붉은 군대로부터 도피하려는 수천의 독일군과 민간인들로 과적되어 있었다. 출발한 지 네 시간이 지나 헬 반도의 남단에 도달했을 즈음 고야 호는 러시아 폭격기의 공습을 받았다. 폭탄에 맞았지만 피해는 경미했고 고야 호는 계속 목적지를 향했다.

폴란드 해역에 도달했을 때 어뢰를 장착한 소련의 잠수함이 고야 호를 포착했다. 그래도 별문제가 없을 수 있었다. 왜냐하면 고야 호가 잠수함보다 빨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함께 항해하던 수행선에 엔진 고장이 발생해 20분 동안 정지해 있었다. 23시52분 잠수함의 함장 블라디미르 코노발로프는 발사를 명령했다. 발사된 네 발의 어뢰 중 두 발이 명중했다. 배는 두 조각이 났고, 4분 만에 가라앉았다. 정확한 인명 피해조차 모른다. 완전한 혼란 상태에서 사람들이 북새통을 이루며 배에 탔기 때문이었다. 7200명에 달한다는 추산도 있다. 어쨌든 6000명이 넘는 것만은 확실하여 최대의 해난 사고라고 알려져 있다.

76미터의 바닥에 가라앉은 침몰 지역조차 정확하게 확인하지 못하다가 58년이 지난 다음에야 폴란드의 잠수부들에 의해 위치가 밝혀졌다.

어뢰에 맞은 날이 4월16일이었다. 바다와 슬프게 맺어지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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