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자 이 글은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의 지난 3일 제69주년 4·3희생자 추념식 추념사 때문에 쓴다는 것을 먼저 알려둔다. “안보, 경제 등 여러 분야에서 우리가 직면한 위기 상황을 극복할 최선의 길은 국민적 화합과 통합”이라는 대목은 백번 지당했다. 그러나 “북한의 무모한 도발 책동이 계속되는 가운데 최근 일련의 사태로 확대된 사회적 갈등과 분열 양상도 심각하다”는 부분에선 숨이 턱 막혔다. 하필 왜, 열에 아홉이 ‘빨갱이’로 몰려 토벌군에 학살된 희생자의 유족 앞에서 북한의 도발 책동 운운했을까. 4·3 당시 미군정은 ‘제주도 메이데이’라는 홍보영상물을 제작해 전세계에 제주도를 ‘레드 아일랜드’로 낙인찍었다. 미군정 경무부(부장 조병옥)는 공식적으로 ‘제주도민의 90%는 공산주의자’라고 공언했다. 정부 수립 후 이승만 대통령은 ‘(그런 빨갱이들을) 처절하게 진압하라’고 명령했다. 1948년 5월 중산간 이상 마을에 대한 초토화를 강요하는 미군 방첩대 장교에게 당시 9연대 정보참모(이윤락)는 이렇게 반문했다. “코흘리개도 빨갱이로 죽여야 하나?” 답변은 참혹했다. “아이들도 모두 세뇌된 공산주의자다.” 그러나 1948년 4월 제주도 주둔 국방경비대 9연대의 김익렬 연대장은 무장대의 규모를 300여명, 무기는 구식 일제소총 27정에 권총 3정이라고 맨스필드 제주 군정관에게 보고했다. 1년 뒤 주한미군 정보참모부 정보보고는 무장대 500여명, 지원세력 1천~1700명이라고 기록했다. 희생자의 80% 이상이 토벌군에 의해 사망했으며, 소련 배후설이나 북한 지원설 모두 근거가 없다고 결론지었다. 그렇다면 왜 3만여명이나 죽였을까. 1999년 황상익 서울대 의대 교수는 ‘의학사적 측면에서 본 4·3’이란 논문을 발표했다. “4·3은 우리 모두를 억압하고 병들게 해온 한국 사회의 병리를 들여다볼 수 있는 통로다. … 빨갱이라는 단어는 나병환자라는 뜻의 문둥이라는 말을 떠올린다. 그러나 문둥이라는 말과 달리 빨갱이에는 실체가 없다. 그러나 실체가 없기에 문둥이라는 말보다 훨씬 더 파괴적이었다.” 제주4·3 이후 ‘빨갱이 낙인’은 남녀노소 누구나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는 즉결처분 명령이었다. 이승만 정권은 빨갱이 낙인을 이용해 발췌개헌도 하고, 사사오입개헌도 했으며, 조봉암 등 정적을 처형했다. 전쟁 중에는 마구잡이 검속된 30만여명을 학살했다. 박정희 정권은 5·16 쿠데타 직후 이른바 용공분자 2만8천여명을 검거해 집단학살하려 했다(유원식 준장 증언). 집단학살은 포기했지만, 이후 유학생 간첩단 사건, 월북자 가족 간첩단 사건,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단 사건, 납북어부 간첩단 사건 등을 조작해 국민의 숨통을 조였다. 전두환은 5·18 민중항쟁을 북한의 조종에 의한 대한민국 전복 기도 사건으로 몰아갔다. 제주4·3과 판박이였다. 군사정권이 종식되고서도 빨갱이 낙인은 여전했다. 이승만-박정희의 후계자들은 지역, 세대 갈등에 이념적 분열을 부채질해 정권을 장악하고 유지하는 데 이용했다. 국민이 선택한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종북정권’이라 했고, 양심적 지식인과 노동자들에게 ‘종북좌파’ ‘좌빨(좌익빨갱이)’ 딱지를 붙였다. 18대 대선 때 박근혜 후보는 그로 말미암은 국민분열의 위험성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100% 대한민국’ 슬로건을 내세웠다. 가는 곳마다 국민통합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겠노라고 다짐했다. 그러나 당선 후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 세월호 침몰로 정권이 흔들리게 되자, 손쉬운 빨갱이 낙인을 들고나왔다. 심지어 세월호 유족들까지도 종북으로 몰았다. 지식인과 문화예술인을 대거 ‘좌빨’로 탄압한 블랙리스트 사건은 그 상징이었다. 해방 공간의 분열상으로 돌아간 듯한 지금의 분열은 그 결과다.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통령 후보는 후보 확정 후 첫 일정으로 현충원을 방문해 이승만·박정희 묘소를 차례로 참배했다. 방명록에 쓴 문구는 ‘국민 모두의 대통령!’이었다. 문자만 다르지 지난 박근혜 후보의 슬로건과 정신은 같다. 통합의 가장 큰 걸림돌은 ‘빨갱이 낙인’이다. 물론 이승만-박정희 추종자들이 그 잘 드는 칼을 버리기는 힘들 것이다. 하지만 ‘빨갱이 낙인’은 그들에게도 치명적이었다. 거기에 안주하던 인권유린과 학정, 무능과 부정부패로 쫓겨나고, 피살당하고, 파면당하고, 처벌을 당했다. 박근혜가 마지막이어야 한다. chank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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