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위원 “독일은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에 막대한 돈을 빚지고 있고 미국은 독일에 제공하는 값비싼 방어에 대해 더 보상받아야 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주 말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와의 정상회담 직후 한 말이다. 대선 때와 다를 바 없는 강경 기조다. 그는 독일의 대미 무역흑자와 관련해서도 ‘공정’을 요구했다. 반면 트럼프 정부의 대중국 발언은 톤이 상당히 바뀌었다. 지난 18~19일 중국을 방문한 렉스 틸러슨 미국 국무장관은 “트럼프 대통령은 미-중 관계 50년의 발전을 위해 방향을 정확히 하기를 기대한다. 미국은 불충돌, 불대항, 상호 존중, 협력 윈윈의 정신에서 관계를 발전시키기를 바란다”고 했다. 그동안 중국이 요구해온 ‘신형대국관계’ 관련 표현을 그대로 쓴 건 의도적이다. 앞선 버락 오바마 정부가 이 관계를 사실상 거부한 것과 비교하면 차이가 크다. 트럼프 정부가 중국과의 소통·협력을 대외정책의 주요 축으로 삼지 못할 이유는 없다. 현실화한다면 새천년 들어 자주 거론됐으나 확실하게 자리를 잡지 못한 ‘주요 2국(G2) 시대’의 새 출발점이 될 수 있다. 동아시아로 좁혀 본다면 새로운 강대국 정치의 시작이다. 물론 상반되는 흐름도 있다. 트럼프 정부는 중국이 심하게 반발하는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 체계 주한미군 배치에 속도를 낸다. 중국이 자신에 대한 봉쇄로 여기는 한-미-일 군사·안보 협력 강화에도 힘을 기울인다. 통상 문제와 남중국해를 둘러싼 갈등 또한 해결하기 쉽지 않고, 북한 핵 문제 해법을 둘러싼 이견도 크다. 트럼프 정부가 아직 대중국 정책 기조를 확정짓지 못한 채 이것저것 떠보는 상황이기도 하다. 아무튼 트럼프 정부가 대중국 정면 대결을 추구할 가능성이 작아진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두 나라가 공존·협력하는 쪽으로 큰 방향을 잡는다면 여러 현안은 얼마든지 ‘빅딜’을 통해 타협할 수 있다. 다음달 초 미-중 정상회담이 그 시험대가 될 것이다. 그렇잖아도 트럼프 대통령은 지역 문제에 복잡하게 얽히기보다는 개입 구도를 단순화하고 눈에 보이는 이익을 먼저 챙기려는 경향이 다분하다. 트럼프 정부는 출범하자마자 국무부 예산을 대폭 줄였다. 외교에서 지금보다 살을 빼지 않으면 끌고 가기가 쉽지 않다. 미-중 관계 재설정이 한반도에 끼칠 파장은 깊고 넓다. 한반도 관련 현안은 자체 논리뿐만 아니라 미국과 중국이 관련된 다른 사안의 동향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다른 사안에서 중국이 물러서는 대신 대북 정책에선 미국이 중국의 체면을 고려해주는 식의 타협이 가능하다. 틸러슨 장관의 방중 때 왕이 중국 외교부장은 “한반도 문제의 본질은 북한과 미국의 문제”라며 “중-미-북 3자 회담에 이어 6자 회담으로 가야 한다”고 했다. 지금으로선 미국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요구지만 통상 문제 등에서 중국이 양보하는 대가로 3자 회담이 시도될 수 있다. 물론 미국 안에서 대북 압박 여론이 강한 만큼 중국이 어느 정도 이에 호응하는 모습을 보여야 할 것이다. 틸러슨 장관은 중국 방문 동안 사드 문제에 대해 공개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중국까지 겨냥한 전략무기인 사드의 배치를 기정사실로 하면서 중국의 대한국 보복도 사실상 용인하려는 모양새다. 중간에 끼인 한국이 고스란히 피해를 뒤집어쓰는 전형적 사례다. 박근혜 정부의 섣부른 사드 배치 결정이 우리 자신을 소외시키는 결과를 낳고 있다. 앞으로 북한 핵 문제에서도 이런 현상이 나타날지 모른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주도력을 확보하고 키워나가는 일이다. 이를 위해선 만사를 한-미 동맹에 의존하려는 태도를 버려야 한다. 미국의 힘을 빌려 북한과 중국을 압박하는 것은 효과가 제한되고 동력도 갈수록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보다 우리가 매개 역할을 할 수 있고 미국과 중국이 힘을 모을 수 있는 대화·협상 방안을 추진하는 게 더 나은 해법이다. 여기에다 북한의 고립감을 덜어줄 내용을 더한다면 북한도 거부하기가 쉽지 않다. 지금 동북아 나라들은 선택의 갈림길에 서 있다. 미-중 관계의 방향이 큰 틀을 좌우하겠지만 한반도 관련 사안에서는 우리 선택이 최우선이 돼야 한다. 특히 북한 핵 문제에 관한 한 모든 게 우리에게서 시작되고 우리와 함께 추진되고 최대 성과를 내도록 노력해야 한다. 곧 구성될 새 정부의 어깨가 무겁다. j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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