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인류학자·연세대 명예교수 대선을 앞둔 시점에서 국민들은 정치공작과 킹메이킹 시스템을 꿰뚫어 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국회의 동의를 거치지 않은 일본군 ‘위안부’ 협상 무효화를 위한 10억엔 모금도 당장 시작해야 할 일 중 하나이다. 시민들이 참여하는 교과서 준비모임도 만들어져야 할 것이다. ‘이성보다는 감정에 반응’하는 탈진실의 시대에 시민들이 할 또 하나의 숙제는 적대와 혐오를 다스리는 일이다. “이게 나라냐?”로 시작한 광장의 정치는 “이게 나라다!”라는 말로 막을 내렸다. 국회는 때를 놓치지 않았고, 헌법재판소 재판관과 특검 검사들의 전문성이 돋보였다. 타락한 언론과 정보 홍수 가운데서도 집단지성의 시민 미디어가 기적을 이끌었다는 생각이다. 물론 최종 박수는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며 경찰버스를 꽃차로 변신시켰던, 청와대 100m 앞에서 열린 대규모 집회에서도 질서 있는 ‘평화시위’를 이어갔던 국민들의 몫이다. 매주 토요일 넉 달 반 동안 이어진 광화문 광장의 집회는 식민지 치하와 전쟁, 남북 분단, 그리고 파행적인 초고속 경제성장으로 얼룩진 대한민국을 온전한 근대국가로 세우는 시간이었다. 유시민씨가 대한민국 헌법은 충분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손에 넣은 ‘후불제 헌법’이었고, 그 헌법이 규정한 민주주의 역시 값을 치러야 하는 ‘후불제 민주주의’라고 했는데 이제 그 값을 제대로 치렀다고 해도 되지 않을까? 역사의 심층구조를 꿰뚫어 보게 된, 국가란 ‘나’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을 확인한 ‘시민적 국민’들은 이제 집으로 돌아가도 좋을까?(꼰대가 되고 싶지 않지만 왠지 오늘은 그 짓을 할 것 같은 예감이다.) 한국은 총자산의 면에서는 선진국에 근접했지만, 자산의 분배나 사회제도화에서는 선진국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한국을 일, 이차 근대화를 동시에 거치고 있는 사회 또는 ‘이중위험사회’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국은 사실상 성급하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함으로 많은 혼란과 오해를 불러일으켜 왔다. 한국은 식민지로부터 시작하여 선진국 문턱에 다다른 드문 사례로서 그런 국가가 제대로 된 근대국가 체제를 갖출 수 있을지를 확인해줄 테스트베드인 것이다. 이번 광화문 시민 혁명을 통해 한국은 그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적어도 국민국가의 꼴을 제대로 갖춘 나라의 국민으로서 당장 해야 할 숙제를 생각해본다. 우선 대선을 앞둔 시점에서 국민들은 정치공작과 킹메이킹 시스템을 꿰뚫어 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과대광고와 홍보기술로 대통령이 만들어질 수 있음을 확인한 국가의 국민으로서 제대로 된 후보 검증의 방안을 내놓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우선 후보들이 악수가 아니라 제대로 공론을 펼칠 무대를 만들어주어야 할 것이다. 주말마다 광화문 무대에서 소신을 피력한 시민들처럼 후보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듣는 자리를 마련하고 그 이야기들을 삼삼오오 모여서 검토하고 확인하는 직접 민주주의의 장을 열어야 한다는 것이다. 주말의 가족 쇼핑 나들이보다 더 즐거운 광장 나들이를 경험한 가족들은 이제 이웃과 함께 모여서 티브이 토론회를 보면서 후보자 검증을 하면서 즐길 수 있을 것이고 자녀와 함께 광화문을 찾은 시민들은 입시교육을 바꿔내는 해법을 찾아내는 일에 착수하리라 믿고 싶다. 국회의 동의를 거치지 않은 일본군 ‘위안부’ 협상 무효화를 위한 10억엔 모금도 당장 시작해야 할 일 중 하나이다. 정권의 주기와 무관하게 시민들이 참여하는 교과서 준비모임도 만들어져야 할 것이다. 그 교과서는 적어도 10년은 걸려서 만들어질 제대로 된 교과서여야 할 것이다. ‘이성보다는 감정에 반응’하는 탈진실의 시대에 시민들이 할 또 하나의 숙제는 적대와 혐오를 다스리는 일이다. 기사에 달린 폭력적 댓글부터 시민들의 힘으로 바꾸어낼 수 있지 않을까? 국가란 법적 절차를 지켜야 할 제도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신뢰와 포용, 소통과 합의를 바탕으로 만들어가는 공동체이다. 탄핵 기각을 외치며 대한문 앞에 모인 사람들, 국기와 군가, 그리고 군복에서 안정을 찾는 그분들도 이 공동체의 일원이다. 나는 탄핵 기각 시위 참여자들을 만나보고 그곳에서 배포한 신문을 읽으며 이분들에게 ‘혁명’은 폭력혁명이고 ‘적폐 청산’은 ‘숙청’과 ‘처단’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았다. 광장에 설치된 ‘단두대’는 ‘빨갱이’의 화신으로, 세월호 희생자에 대한 극진한 추모는 자신들의 희생을 백안시하는 행위로 읽힐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6·25와 월남전에 참전한 이들 대부분은 살인까지를 했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그 전쟁의 ‘악몽’과 공포, 그리고 죄의식에 대해 그간 대한민국은 어떤 위로를 건넸던 것일까? 대한민국이 명실공히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국민의” 나라가 되겠다면 그간의 비정한 역사가 만들어낸 타자화된 얼굴들을 만나기 시작해야 할 것이다. 조급하면 안 된다. 그러나 게으르지는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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