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원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여성으로 흑인 노예였다면 아마도 인간으로서 가장 비참한 운명을 타고 태어났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노예제를 인정하던 당시의 미국 메릴랜드 주에서 태어난 해리엇 터브먼은 그에 더해 노예 시절 받았던 채찍질을 비롯한 폭력의 후유증으로 심한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겪어야 했다. 그렇지만 그는 가혹한 운명에 결코 굴복하지 않았다. 오히려 비슷한 처지의 다른 사람들을 돕는 데 헌신했다. 터브먼은 1849년 자유를 찾아 필라델피아로 도주했다. 그러나 그는 자유를 만끽할 틈이 없었다. 떠나온 곳에 남은 가족들 생각 때문이었다. 그는 다시 돌아가 가족과 친척뿐 아니라 다른 흑인들까지 자유의 땅으로 도피시켰다. 그 어려운 임무에서 한 명도 낙오되지 않았다. 도주한 노예가 체포되면 자유주에서도 무조건 이전 주인에게 반환해야 한다는 악명 높은 1850년의 “도망 노예법”이 통과된 뒤에도 멈추지 않고 더 많은 흑인의 도주와 정착을 도왔다. 남북전쟁이 발발한 뒤에는 북군에서 활동했다. 요리사와 간호사로 북군을 돕다가 후에는 척후병과 첩자로서 더 직접적으로 공훈을 쌓았다. 더 나아가 그는 전쟁에서 군대를 이끈 최초의 여성이 되어 ‘컴비 강 습격’ 사건을 지휘해 750명이 넘는 흑인을 구출했다. 전쟁 이후 은퇴한 그는 늙은 부모를 봉양하는 한편 기력이 남아 있을 때까지 여성 참정권 운동에 힘을 보탰다. 그는 말년을 흑인 양로원에서 보냈는데, 그 시설도 그의 도움으로 건립된 것이었다. 그를 이끈 힘 가운데 하나는 독실한 기독교 신앙이었다. 개인적 곤경을 넘어서 인류애를 실천할 힘을 주는 신앙이라면 바람직하다만, 증오와 반목을 조장하는 이곳 대형 교회의 행태란…. 2016년 미국의 재무장관은 미국의 20달러 지폐에 해리엇 터브먼의 초상을 넣기로 결정했다. 미국의 7대 대통령 앤드루 잭슨 대신 이 흑인 운동가가 선정된 것이다. 그 지폐는 2020년부터 통용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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