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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김지석 칼럼] 트럼프의 새 질서?

등록 2017-01-25 17:13수정 2017-01-25 21:08

트럼프의 새 질서는 구축되기 어렵고 지속성도 보장할 수 없다는 게 온당한 평가다. 어느 한 나라만 바라보는 것은 잘못이며, 균형 있는 접근만이 우리 삶의 지속적 발전을 보장한다. 트럼프의 새 질서를 믿지 말고 ‘우리 자신의 실천’을 해야 한다.
김지석
논설위원

‘이단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새로운 세계질서 구축에 나섰다. 잘 짜인 각본은 없지만 의지는 강하다. 그의 임기가 끝날 때쯤이면 어떤 형태든 세계가 상당히 바뀌어 있을 것이다.

미국의 지금 시도는 냉전이 막 끝난 1990년대 초와 비교가 된다. 당시 미국 안에선 ‘신세계질서’ 논의가 무성했다. 계기는 소련·동유럽 사회주의권의 격변이고, 미국이 주도한 1991년 걸프전은 새 질서의 시작을 알린다. 신세계질서의 축은 크게 둘이다. 하나는 미국의 앞선 정보통신기술과 금융산업을 기반으로 한 신자유주의다. 미국은 경제성장과 물가안정이 공존하는 이른바 신경제를 만들어낸다. 세계화 공세에 힘입어 이 모델은 지구촌으로 퍼져나간다. 다른 하나는 군사력과 지도력으로 뒷받침된 미국이라는 유일 초강국의 존재다.

10년 이상 잘 작동하던 이 질서는 2003년 미국의 일방적인 이라크 침공으로 균열이 생긴다. 미국의 권위는 떨어지고 유럽연합과 중국 등이 그 틈을 메운다. 2008년 미국발 세계 경제위기는 이 질서의 파산을 알리는 전환점이다.

그래도 신세계질서는 20년가량 유지됐다. 트럼프의 새 질서도 그럴 수 있을까? 무엇보다 미국의 무기가 빈약하다. 새 질서의 지향점을 압축한 미국 우선주의는 경제 면에서 중상주의와 일방주의를 고갱이로 한다. 정부가 경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다른 나라를 압박해 이익을 관철하는 시스템이다. 서구 자본주의의 초기나 후발국이 추격 발전을 꾀할 때 나타난 형태다. 내용을 채울 미국의 산업도 분명하지 않다. 신경제는 3차 산업혁명의 전형이 됐지만, 트럼프의 시야는 자동차·석유·군수·부동산 등 낡은 산업에 머문다. 최근 논의되는 4차 산업혁명은 트럼프와 거리가 있다.

트럼프는 미국의 지도력 유지에도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그는 오랫동안 미국 패권의 주요한 토대였던 유럽 대륙과의 대서양동맹을 백안시한다. 그의 반중국·반이슬람 노선은 숱한 갈등을 만들어낼 것이다. 그가 신뢰하는 친구는 영국·인도·이스라엘 등 핵심축이 되기 어려운 몇몇 나라와 유럽 극우파다. 미국의 군사력이 여전히 막강하더라도 혼자서 모든 걸 관철할 수는 없다. 트럼프의 새 질서는 구축되기 어렵고 지속성도 보장할 수 없다는 게 온당한 평가다.

우리나라는 이전 신세계질서에서 미국의 그늘에 안주했다. 금융위기를 겪고 신자유주의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사회·경제의 양극화가 심해졌다. 북한 핵 문제가 결정적으로 악화한 것도 이 기간이다. 경제의 덩치가 커졌지만 나라의 독립성과 안정성은 그렇게 높아지지 않았다. 통일의 전망도 요원하다.

트럼프의 시도는 우리에게 선택을 강요한다. 그 전에 원칙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우선 분명한 것은 트럼프가 어떤 시도를 하더라도 실제 나타날 새 질서는 다극화를 기반으로 한다는 점이다. 경제적으로는 4차 산업혁명에 먼저 도달하는 나라가 우위에 서게 될 것이다. 또한 한 세대가 지나기 전에 중국의 종합국력이 미국보다 커지고 아시아의 생산력이 서구를 넘어서게 된다. 어느 한 나라만 바라보는 것은 잘못이며, 균형 있는 접근만이 우리 삶의 지속적 발전을 보장한다. 친미냐 친중이냐는 선택을 넘어서 지역 통합과 공동의 번영을 지향하는 새 접근이 필요하다.

최대 안보 현안인 북한 핵 문제에서도 새 출발이 요구된다. 이제까지 경험으로 볼 때 핵 문제는 우리의 주도력이 확보될 때만 진전이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게 중요하다. 그런데 트럼프의 등장과 함께 미-중 대결 분위기가 강해지면서 북한 핵 문제는 미·중 등 관련국들의 정책에서 우선순위가 떨어지고 있다.

핵 문제 해법을 논의할 공동의 틀을 활성화하고 관련국들을 결집해야 할 우리의 책임이 더 커지고 있다. 이를 위해선 먼저 핵 문제를 모든 외교 과제의 선두에 놓고 관련국을 설득해야 한다. 건강한 한-미 동맹과 균형외교가 여기서 힘을 발휘한다. 특히 사드 문제를 악화시키는 건 금물이다. 아울러 북한과의 대화 통로를 넓혀가야 한다. 트럼프 정부는 적어도 한 차례는 대북 대화를 시도할 것이다. 이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대북 제재·압박은 핵 문제 해결을 위한 수단일 뿐이다.

항상 그렇듯이 격변기는 위기이자 기회다. 큰손들의 움직임에 수세적으로만 대응해서는 잃을 게 더 많다. 트럼프의 새 질서를 믿지 말고 ‘우리 자신의 실천’을 해야 한다.

j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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