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원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1903년부터 7년이 넘게 영국 사회에선 생체 실험을 둘러싼 충돌이 심한 사회 갈등을 유발했다. 게다가 그 갈등은 국경 너머까지 확대되었다. 그 전말은 다음과 같다. 1903년 2월 윌리엄 베일리스라는 런던대학교의 생리학과 교수가 60명 정도의 의학도 앞에서 테리어종의 갈색 개 한 마리에게 생체해부를 불법적으로 자행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개에 대한 실험으로 호르몬을 발견한 의학적 성과를 올린 바 있는 베일리스는 개를 적절하게 마취시켰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문제를 제기한 스웨덴의 여성 행동가들에 따르면 개는 의식이 있어 고통스러워했다는 것이다. 영국의 ‘생체해부 반대 협회’에서는 그것이 잔인하고 불법적인 처사였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베일리스는 즉각 명예훼손으로 고소해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이것은 전초전에 불과했다. 생체해부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인근의 공원에 갈색 개의 동상을 세웠다. 거기에 부착된 명판이 의학도들을 자극했다. “영국의 신사숙녀 여러분, 언제까지 이런 짓을?” 그들은 틈만 나면 동상을 훼손했다. 경찰이 하루 24시간 경호에 나서야 했다. 경찰과 의학도의 충돌이 빈번해지며 1907년 12월10일 밤에 최악의 사태로 치달았다. 천여명의 의학도가 개의 허수아비를 들고 행진했다. 그들의 맞은편에는 여성참정권 운동가들, 노조원들과 400여명의 경찰이 대치했다. 그리고 전쟁을 방불케 하는 충돌이 이어졌다. 1910년 3월 오랜 소동에 지친 경찰 당국은 야음을 틈타 동상을 제거한 뒤 녹여 없앰으로써 이른바 ‘갈색 개 사건’은 마무리되었다. 어찌 보면 우스꽝스러웠던 이 사건에선 양측 모두에게 정당성이 있었다. 의학도들은 실험을 통한 의학 지식 증진이라는 명분을 내세웠고, 생체해부 반대자들은 동물에게도 권리가 확대되어야 한다는 당위성을 설파했던 것이다. 백남기 어른의 사인부터 여러 의료인들의 국정농단까지 그들의 명분은 어디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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