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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조한혜정 칼럼] 광장에서 익어가는 시민정치

등록 2016-12-20 18:20수정 2016-12-20 20:14

조한혜정
문화인류학자·연세대 명예교수

나는 특히 ‘깨시민’들이 또다시 멘붕에 빠지지 않으려면 청년기에 육이오 전쟁이나 베트남 전쟁 또는 ‘무장공비’가 출현한 1950년에서 70년대를 살아남은 세대가 ‘안보’라는 이름을 주문처럼 외우게 된 것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하고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비난이 보톡스를 한 자신에 대한 비난이라고 생각하는 할머니를, 그분들의 역사적 실존을 알아보기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토요일 오후 광화문으로 향하는 시민들이 줄을 잇는다. “이게 나라냐?”는 질문으로 시작한 집회에 참여하면서 나라도 바로 세우고 친구도 만나고 아이들 사회교육도 시킨다. 집회 다녀온 밤에는 잠을 잘 잔다는 후배는 서로에게 지지를 보내는 그곳에서 느끼는 환대의 기운 덕이라고 했다. 친구들과 몰려와 목 터져라 구호를 외치는 고등학생들에게서 나는 시민이 끌어가는 건강한 나라의 미래를 본다. ‘개념 없는’ 대통령을 퇴진시키려는 광장의 정치는 국회의 탄핵소추 결정을 얻어냈고 그 공은 지금 헌법재판소로 넘어가 있다. ‘정권퇴진 비상국민행동’(퇴진행동)이 주관해온 이 집회는 벌써 9주째 접어들고 있다.

지난 주말에는 탄핵 반대 집회도 열렸다. ‘대통령 탄핵기각을 위한 국민총궐기 운동본부’(탄기국)는 자신들의 집회를 ‘맞불 집회’가 아니라 ‘태극기 집회’라 불러달라고 했다고 한다. 나도 이들의 시위를 맞불보다는 또 다른 목소리로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분법적 구도는 위험하다. 2014 세월호 참사 이후 거국적 애도의 흐름이 냉소와 무관심으로 바뀐 배경에는 적대와 혐오를 이용하는 통치술이 작용했다. 이미 ‘단톡방’에서는 대통령 탄핵 ‘북 배후설’이 유포되고 있다고 한다. 누리꾼(네티즌)들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댓글에 좋아요, 말도 안 되는 음해라고 생각되는 댓글엔 싫어요 한번 누릅시다!”(elus****)라며 댓글 공간의 정치에도 적극 대응하자고 권한다. 그간 “퇴진하라” “구속하라” 구호를 선창해온 사회자의 목소리는 갈라지고 있지만(그래서 쉬어야 할 것 같다) 시민정치의 장은 점점 더 똑똑해지고 있다. 80년대 민주화를 이끈 세대와 디시인사이드 주식갤러리와 같은 네티즌수사대를 자처하는 온라인 세대가 합류하면서 진위를 가리는 시민들은 막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 시민 정치는 이제 함성과 구호를 넘어 본격적인 참여정치의 장을 열어가는 중이다.

그런데 시민 정치란 정의를 바로잡는 것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합리성의 개념으로 본다면 좋은 사회는 도구적 합리성과 소통 합리성이 균형을 잡은 세계이다. 목적을 이루기 위한 경쟁과 전략의 ‘시스템’과 서로를 보듬어 안는 소통과 공존의 ‘생활세계’가 균형을 잡아가야 한다. 정의를 위해 잘 싸우기 위해서는 내 존재가 인정되는 환대의 시공간이 든든하게 버텨주어야 한다. 지금처럼 모두가 조물주 정신으로 무장하고 외톨이가 되어 분투하는 살벌한 상황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다행히 광화문 광장은 소통과 공존이 가능한 나와 너, 우리의 존재를 감사하는 ‘사회’의 씨앗을 심었다. 우기면 이기는 세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고, 타인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이제 그 씨앗을 일상의 공간에 심기 시작해야 할 것이다.

사회학자 리처드 세넷은 유럽의 68혁명을 분석하면서 일시적으로 함께하는 ‘연대’는 위험하다고 했다. 대신 지속적 협력이 가능한 사회성을 키워야 한다고 했다. 이때 사회성은 타인에게 능동적으로 손을 내미는 것이 아니고 서로를 알아보는 행위이다. 광화문 촛불이 그간의 촛불집회와 다른 점은 ‘다중(다양한 국민 주체들)’이 서로를 알아보면서 신뢰의 관계를 맺어가려고 노력했다는 점일 것이다. 운동권과 비운동권, 서로 잘 어울리지 못하는 60년대생과 70년대생, 남자와 여자, 경제적 여유계층과 아닌 층이 광장에서 서로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나는 특히 ‘깨시민’들이 또다시 멘붕에 빠지지 않으려면 1인당 국민총생산(GNP) 100불도 안 되는 시절에 자란 할아버지를 만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청년기에 육이오 전쟁이나 베트남 전쟁 또는 ‘무장공비’가 출현한 1950년에서 70년대를 살아남은 세대가 ‘안보’라는 이름을 주문처럼 외우게 된 것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하고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비난이 보톡스를 한 자신에 대한 비난이라고 생각하는 할머니를, 그분들의 역사적 실존을 알아보기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치의 시작은 만남이다. 적대의 촛불은 소통과 상생의 촛불로 진화할 수 있을까? 서로의 삶을 들여다보고 만나는 것, 자백이 아니라 고백이 하고 싶어지는 자리, 도움을 청하고 의논하는 약한 자신의 모습을 사랑하게 되는 것, 이것이 시민 정치의 승리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아가면 좋겠다. 크리스마스이브 집회에는 산타 청년들도 등장한다고 한다. 그 밤이 십시일반 시민들의 정성과 지혜와 헌금으로 풍성하기를!

[관련 영상] 한겨레TV | 더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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