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원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카를 폰 오시에츠키는 20세기 초 독일에서 연극 비평이나 페미니즘 같은 문화적 주제에 관한 기사를 주로 썼지만, 빌헬름 2세 치하 독일 제국의 말년에 군국주의가 횡행하는 것을 보고 거기에 저항하며 평화주의자가 되어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된 기자였다. 1차대전 당시 징집당해 전쟁의 참화를 직접 경험하면서 평화주의는 더욱 확고한 신념이 되었다.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 그의 정치적 평론은 민주주의와 다원주의 사회에 대한 열렬한 지지자라는 평판을 안겨주었다. 그가 정치와 예술에 초점을 맞춘 주간지 <벨트뷔네>의 편집장이 된 뒤 필화 사건에 휘말렸다. 독일군이 “M 대대”라고 불리던 특수 비행단을 소련에서 비밀리에 훈련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한 기자가 폭로한 것이다. 그것은 1차대전 이후 독일이 무장을 할 수 없다는 베르사유 조약을 위반한 것이었다. 기자와 편집장 오시에츠키는 대법원에서 심문을 받은 뒤 “반역과 간첩”의 혐의로 기소되었다. 둘 다 18개월 징역형을 선고받았으나 기자는 외국으로 도주했고, 오시에츠키는 크리스마스 대사면으로 풀려나왔다. 석방된 뒤에도 그의 필봉은 멈추지 않아 군국주의와 나치에 대한 비판을 멈추지 않았고, 총통이 된 뒤에도 히틀러를 비판하는 몇 안 되는 목소리로 남았다. 결국 그는 체포되어 집단수용소에 감금되었다. 수용소에서 그에 대한 처우는 특히 무자비했다. 국제적십자사에서 그를 접견하고 남긴 보고서는 이렇다. “감정이 없는 듯 창백하게 떨면서 한 눈은 부어오르고 이는 뽑힌 채 부러진 다리를 질질 끌고 있는 물체를 보았다. 견딜 수 있는 최극단에 도달한 인간이었다.” 그가 1935년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결정되자 괴링은 거절하라고 압력을 넣었다. 오시에츠키는 그 압력을 거절했다. “상을 받으면 독일 사회와 절연된다는 비밀경찰 대표자의 견해에 반대한다. 노벨 평화상은 국제적 정치 투쟁이 아니라 국민들 사이의 이해의 상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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