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행복팀 선임기자 주말에 광장으로 가는 발걸음은 설렌다. 광장엔 후련함이 있다. ‘더 이상 못 참겠다’며 쌓아둔 화는 광장에서 촛불이 되어 다함께 뿜어져 노래가 되고 풍자가 되고 축제가 된다. 저마다 삶이 다른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사람들이 함께 울리는 외침은 색다른 분노로 응집한다. 광장으로 우리를 이끈 감정은 분명 화였을 텐데 광장 사람들의 화는 흔한 일상의 화와 달랐다. 흔히 화, 분노는 이성을 마비시키는 부정적인 감정으로 꼽힌다. 찾아보니 심리학·사회학·의학 연구도 많다. 화를 자주 내면 몸에 병을 키울 수 있다. 사소한 화가 인간관계를 해치고 가족관계마저 망가뜨린다. 화는 자기주장을 윽박지르며 공격적이고 합리적 판단을 망칠 수 있다. 그래서 화를 잘 풀고 다스리기는 몸과 마음에 중요한 문제가 된다. 베트남의 틱낫한 스님은 저서 <화>에서 화를 잘 풀어 마음의 평화를 얻는 지혜를 강조했고, 고대 스토아학파의 세네카는 <화 다스리기>에서 ‘그 어떤 경우에도 화는 필요하지 않은 감정’이라고 경계했다. 화난 광장에서 우리가 본 것은 화를 차분하며 단호하고 후련하게 뿜어내는 그런 촛불 민심이었다. 우리가 경험한 촛불 민심의 분노를 설명해줄 다른 이론은 없을까? 분노 감정의 재조명은 최근 활발해 보인다. 2007년 미국 캘리포니아대학의 웨슬리 문스 등 연구진은 ‘화가 늘 부정적이고 비합리적일까’ 하는 진지한 물음을 던지며 몇 가지 심리실험을 했다. 연구진은 실험 참여자들한테 ‘미래의 꿈’에 관한 글을 쓰고 익명의 평을 듣게 했다. 모욕적이며 신랄한 평이 전해진다. 일부러 약을 잔뜩 올려 화를 돋우는 실험장치다. 연구진은 이렇게 화난 집단과 그렇지 않은 집단에게 주장의 방식이 다른 두 글을 주고서 누가 더 분석적으로 따지는 글을 선호하는지 측정했다. 실험에선 화난 이들이 정보를 더 분석적으로 처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진은 분노가 간명한 사유와 따져보는 정보처리를 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는 해석을 제시했다. 2011년에 다른 실험도 있다. 캘리포니아대학의 마이아 영 등 연구진이 마찬가지로 화난 집단과 그렇지 않은 집단을 대상으로 한 실험이었는데, 이번엔 어느 집단이 얼마나 자신만의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않으면서 합리적 판단을 하는지를 측정했다. 실험에선 화난 이들이 자기 고정관념에서 좀더 쉽게 벗어나 합리적 선택을 하는 경향을 보였다. 어떤 조건에서 때로는 화가 좌고우면이나 선입견에서 벗어나 목표에 맞는 판단의 합리성을 보이는 데 도움을 준다는 해석이다. 미국 학자 워런 텐호텐은 <감정과 이성>(2012)이란 책에서 ‘목표를 지향하는 합리성’의 측면에서 화가 일정한 역할을 한다는 최근 실험과 이론을 소개했다. 틱낫한 스님과 고대 지성 세네카가 걱정한 ‘분노의 일탈과 함정’은 늘 경계해야 하지만, 이런 연구 흐름을 보면 화는 오히려 합리적 결정으로 나아가는 데 때로 도움을 준다. 분노는 복잡한 상황·변수들, 위험들, 고정관념들을 간명하게 바라보면서 덜 중요한 것을 넘어 목표로 나아가는 의사결정을 쉽게 해주기도 한다는 이론이다. 광장 민심의 분노는 ‘나홀로 분노’가 하지 못한 슬기로운 판단을 보여주었다. 불확실한 상황에 대한 우려에도, 현실 정치권의 꼼수에도, 광장의 화난 민심은 휘둘리지 않으면서 헌법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를 향해 나아가며 분노했다. 차분하고 단호하게 펼쳐진 ‘다함께 분노’는 좌고우면의 상황을 넘어 ‘탄핵 표결’이라는 너무나도 상식적인 결론을 간명하게 요약해냈다. 오늘은 화난 촛불들이 일궈낸 탄핵소추 표결의 날이다. cheolwo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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