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원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노예제 폐지를 둘러싼 미국의 내전이 북부의 승리로 돌아가 노예해방령이 선포되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전쟁 이전의 상황에서 남부의 노예가 북부로 도주하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일반화를 시키기는 어렵지만, 그나마 교훈적인 결말을 이끌어낸 것이 다음의 사례이다. 조지 래티머는 백인 아버지와 흑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노예였다. 남부의 버지니아주에서 가내 하인이었다가 마부로, 일꾼으로 팔려나갔던 그는 주인의 빚 때문에 옥살이까지 했다. 그를 마지막으로 소유했던 주인은 제임스 그레이라는 상점주였는데, 래티머는 학대를 견디다 못해 임신 중인 아내와 함께 매사추세츠주의 보스턴으로 도주했다. 그레이는 주 경계 내부에서 래티머를 잡아올 경우 25달러를, 그 너머에서는 50달러를 주겠다고 현상수배 했다. 그레이 밑에서 일하던 사람 하나가 보스턴에서 래티머를 알아본 뒤 그는 곧 체포되어 법정에서 수감되었다. 그의 구금 소식이 알려지며 구명 운동이 일어났다. 그의 변호사는 노예제를 강하게 반대해온 법관 르뮤엘 쇼에게 그의 문제를 배심원들이 결정할 수 있게 해달라고 청원했으나 거절당했다. 그것은 연방정부에서 해야 할 일이며 주 정부에서는 그 결정이 아무리 달갑지 않더라도 따라야 한다는 논리였다. 지역의 여론이 들끓었다. ‘래티머 위원회’가 조직되었고, 그를 돕기 위한 신문도 창간되었다. 그들은 청원서를 작성했다. 도주 노예 혐의를 받는 자들 문제에 주의 관리가 개입하거나 감옥 같은 주의 시설을 사용하는 것을 금지시키려는 청원과 매사추세츠주는 노예제와의 어떠한 고리도 끊어야 한다는 청원이었다. 결국 그것은 ‘래티머 법’으로 귀결되었는데, 거기에는 청원서의 내용이 그대로 반영되었다. 그러는 사이에 기금도 조성되어 래티머는 400달러에 그레이로부터 자유를 살 수 있었다. 도주 당시 뱃속에 있던 아들 루이스 하워드는 개량된 전구를 만들어 미국 발명가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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