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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하종강 칼럼] 저성과자 퇴출 제도가 퇴출돼야 하는 이유

등록 2016-09-13 17:19수정 2016-09-13 18:58

하종강
성공회대 노동아카데미 주임교수

예전에는 옆자리 동료가 실수를 해 민원인에게 큰 손해를 입힐 가능성이 보이면 미리 일러주는 것이 상례였다. 저성과자 퇴출 제도가 도입되면 이러한 동료애 역시 눈 녹듯 사라진다. 비슷한 구성원들 중에서 누군가 하나는 확실하게 퇴출 대상자로 선정돼야만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알고 지내는 방송사 피디에게서 휴대폰 문자가 들어왔다. “아무개 피디도 오늘 이곳으로 발령받았습니다. 지금 같이 술 한잔하고 있습니다.” 그 사무실은 방송사가 이른바 ‘저성과자’로 분류한 직원들만 따로 모아 놓은 곳이다. 사무실 위치도 본사와 동떨어진 시내 한가운데다. 다른 직원들과 접촉하는 기회를 없애 버리겠다는 속셈이 읽힌다. 친분이 있는 방송사 직원들 여러 명이 그 사무실로 속속 발령을 받았다. 나와 안면이 있다는 것은 그동안 노동문제를 관심 있게 다뤄 온 언론인이거나 언론노조 간부 활동 경력이 있다는 뜻이다.

그 사람들 중 상당수는 언론인으로서 자질이 부족하거나 불성실한 직원들이 아니라 회사 경영진이나 정부와 ‘코드’를 맞추지 않은 사람들일 뿐이다. 일찍이 인생의 미래를 언론인으로 설계하고 ‘언론고시’라고 불리는 관문을 거쳐 방송사에 들어와 ‘권력의 나팔수’ 노릇을 할 수는 없다는 생각으로 ‘공정방송’ 구현을 위해 다시 언론 현장에 복귀할 날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다. 회사로서는 나름 그 직원들의 최근 업무 성과가 없다는 자료를 제시할 수 있겠으나 방송사 업무 특성상 편성에서 제외하고 일감을 주지 않으면 특정인의 업무 성과가 없도록 만드는 것은 식은 죽 먹기만큼이나 쉬운 일이다. 저성과자를 퇴출시킬 수 있는 일반해고 도입 정책은 이처럼 눈엣가시처럼 보이는 직원들을 현장에서 솎아내고 싶은 속내를 품고 있다.

직원이 2만여명이나 되는 기업에서 30여명의 직원들을 저성과자로 분류했다. 회사는 저성과자 선정 방식이나 기준을 명확히 밝히지 않았다. 저성과자로 분류된 사람들 중에는 업무 수행 능력이 부족하다기보다 회사의 인사노무 방침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임원에게 소신껏 반대 발언을 한 직원 등이 포함됐다. 당사자들과 노동조합이 회사에 강력히 문제를 제기해 “퇴출과 연결시키지는 않겠다”, “재교육 기간 동안 업무성과 평가도 하지 않는다”는 확답을 받아냈다. 그러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굳이 저성과자를 선정했느냐는 질문에 회사 임원은 “당신들 30여명으로 나머지 2만여명의 직원들을 긴장시키는 효과가 있다”고 답했다.

이러한 비인간적 경쟁을 강요하는 경영방식이 기업 경영효율을 오히려 저하시킨다는 연구 성과들이 많다. 다른 직원들을 긴장시키기 위한 도구로 이용당하며 “2만여 직원들 중 최하위 저성과자 30여명”에 속했다는 낙인이 찍힌 채 가족과 동료들로부터 따가운 시선을 받아야 하는 노동자들의 상처는 자본주의 사회 기업 경영자들의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

다행히 그 ‘저성과자’들 중 산전수전 다 겪은 활동가가 포함됐다. 회사로서는 큰 실수를 한 셈이다. 그 활동가가 동료들과 여러 번 모임을 갖고 “이번 일을 그동안 소홀히 했던 인문학 소양을 갖추기 위한 기회로 삼자”고 의기투합하기에 이르렀다. 정기적 모임을 갖고 공부도 하고 강의도 들으며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재교육 기간을 보람 있게 채웠다. 노동조합과 당사자들이 회사에 강력히 요구해 그나마 저성과자 선정이 해고로 연결되는 일은 없도록 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공무원들은 주기적으로 인사이동을 하고 업무분장이 바뀐다. 새로 온 직원들에게 기존 직원들이 업무를 가르쳐주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가르치는 동료는 보람을 느끼고 배우는 동료는 고마워하는 것이 공직 사회의 오랜 미풍양속이다. 저성과자 퇴출 제도가 도입된 뒤 이러한 관행이 눈 녹듯 사라졌다. 예전에는 옆자리 동료가 실수를 해 민원인에게 큰 손해를 입힐 가능성이 보이면 미리 일러주는 것이 상례였다. 저성과자 퇴출 제도가 도입되면 이러한 동료애 역시 눈 녹듯 사라진다. 비슷한 구성원들 중에서 누군가 하나는 확실하게 퇴출 대상자로 선정돼야만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업무 성과가 향상되는 직원이 나타날 수는 있으나 사무실 전체의 집단적 ‘스펙’이 눈에 보이게 떨어질 수밖에 없다. 공직 사회에서 저성과자 퇴출 제도를 시행했다가 폐지한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그 케케묵은 제도를 다시 되살리겠다는 것이 정부의 노동시장 구조개혁 중 저성과자 퇴출을 가능하게 하는 일반해고이다. 고용노동부의 ‘저성과자 해고 지침’ 시행 이후 저성과를 이유로 한 해고가 정당하다는 1심 법원의 첫 판결이 우려스러운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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