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하종강 칼럼] 올림픽 메달과 일자리의 방정식

등록 2016-08-16 18:33수정 2016-08-16 18:56

하종강
성공회대 노동아카데미 주임교수

고등학교 한 반 30명 중에서 겨우 한 명만 안정적 직장에 정규직으로 취업할 수 있다. 운동선수들이라고 해서 예외일 수는 없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되느냐 못 되느냐 하는 것이 인생의 갈림길에서 향방을 결정하는 사회라면 훨씬 더 가혹할 수도 있다.

3년 전 수업을 들었던 제자들이 시민단체 강연에 찾아왔다. 포스터에서 내 얼굴을 발견하고 조금 먼 거리였지만 시간을 내 찾아왔노라고 했다. 강연이 끝난 뒤 뒤풀이 장소까지 함께 걷는 동안 제자들이 입을 모아 말한다.

“그동안 교수님 수업에서 들었던 모든 노동문제를 다 겪어 봤어요.” “비정규직, 계약직, 권고사직, 정리해고… 모두 당해봤어요.” “진정·고소도 해봤고 민사소송도 진행 중이에요.”

늦은 시간에 먼 곳까지 찾아와준 제자들을 집 가까운 곳까지 태워다주느라 차를 타고 함께 이동하면서 그 가슴 아픈 사연들을 들었다. 이른바 ‘취업 5종 세트’라고 불리는 ‘스펙’을 나무랄 데 없이 갖춘 청년들이었다. 앞으로 그 어려움을 헤쳐나갈 수 있는 뾰족한 길은 잘 보이지 않았다. 못난 스승은 제자들에게 뭐라고 더 해줄 말이 없었다.

국제통화기금(IMF)이 <한국 경제 주요 현안 보고서>를 통해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비정규직 비율이 가장 높은 나라다. 신규 고용의 70%가 비정규직 노동자이다. 이 같은 노동시장의 이중 구조가 한국 경제를 저해했고, 향후 발전도 제약할 것이다”라고 경고한 것이 벌써 12년 전 일이다. 그 뒤 상황이 개선되기는커녕 더욱 악화돼 지금은 신규 고용의 80%가 비정규직이다.

오랜 기간 ‘참교육’을 고민해온 교사들과 함께하는 연수 과정에서 만난 선생님들은 토론 시간에 “우리가 열심히 가르쳐봐야 결국 사회에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계속 대주고 있는 꼴이다”, “공장 옆 허름한 방, 그것도 기숙사라고… 제자들만 그 방에 남겨둔 채 ‘어려워도 몇 년만 버텨보라’ 부탁하고 혼자 동네를 빠져나오는데 슈퍼마켓 하나 없는 그곳에서 최저임금 받으며 몇 년 동안 버티라는 건 죽으라는 말이나 마찬가지인 것처럼 느껴져 눈물이 나왔다”고 낙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못난 강사는 선생님들에게 뭐라고 더 해줄 말이 없었다.

올림픽 경기가 한창이다. 금메달을 딴 선수들은 대부분 어찌할 줄 모를 정도로 기뻐했다. 은메달이나 동메달에 “그친” 선수들 중에서는 울먹이는 사람도 있어서 지켜보는 이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렇지만 은·동메달도 전 세계 수십억 사람들 중에서 2등 또는 3등이라는 뜻이니 얼마나 놀라운 성과인가? 곰곰 생각해보면 그 자리까지 가지 못한 채,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땀 흘리고 있을 수많은 선수들에 비하면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가? 선수들의 피땀 어린 노고와 메달의 높은 가치를 폄하하려는 의도가 절대로 아니니 오해가 없었으면 좋겠다.

선입견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으나, 메달을 따거나 탈락이 결정된 뒤 선수들의 반응이 나라에 따라 조금씩 다른 미세한 차이가 눈에 뜨이는 경우가 있었다. 비단 이번 올림픽에만 국한된 느낌은 아니니 특정 선수를 지칭해 비하하고자 하는 말은 더더욱 아니다. 어디까지나 주관적 느낌이어서 그 ‘미세한 차이’에 사실과 다른 불찰이 있다면 오로지 글쓴이의 책임이다. 생각이 다른 사람들의 용서를 미리 구한다.

그 ‘미세한 차이’는 경쟁에서 승리한 소수와 그렇지 못한 다수의 삶이 극명하게 차이가 나는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경제협력개발기구 나라 중 한국의 저임금 노동자 비중은 2위이고 소득 불평등도는 4위이다. 노동자들은 ‘최장시간 노동’에 시달리고 학생들은 ‘최장시간 학습’으로 신음한다. 우리나라 고등학생들이 나중에 대기업이나 공기업의 정규직이 될 수 있는 확률은 30분의 1에 불과하다는 통계도 있다. 고등학교 한 반 30명 중에서 겨우 한 명만 안정적 직장에 정규직으로 취업할 수 있다는 뜻이다. 운동선수들이라고 해서 이러한 현실에서 예외일 수는 없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되느냐 못 되느냐 하는 것이 인생의 갈림길에서 향방을 결정하는 사회라면 훨씬 더 가혹할 수도 있다.

청년들이 불과 3년여 동안 비정규직, 계약직, 권고사직, 정리해고 등을 모두 경험해야 하는 사회에서는 모두 다 1등이 되기 위해 매진할 수밖에 없다. 수영을 좋아하는 운동선수가 동네 체육관에서 주민들에게 평생 동안 수영을 가르치며 대기업 정규직만큼 안정적 소득을 누릴 수 있다면 반드시 1등이 되지 못해도 크게 걱정할 일이 없다. 운동을 그 자체로 즐길 수 있느냐 여부도 결국 일자리 문제다.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1.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2.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3.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4.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5.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