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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조한욱의 서양사람] 각주 전쟁

등록 2016-08-11 18:09수정 2016-08-11 20:09

조한욱
한국교원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앤서니 그래프턴은 특이한 역사가다. 그는 미국에서 태어나 박사학위를 받았지만 미국의 역사가라고 규정하기는 어렵다. 그는 런던 대학교에서 수학했고, 이탈리아의 대학자 아르날도 모밀리아노에게 사사했으며,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고전학자와 예술가는 물론 점성술가에 대한 연구에 이르기까지 폭넓고도 깊은 지식으로 명성 높다. 그 업적을 인정받아 그는 미국 역사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그의 국제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각주의 역사>라는 독특한 책이다. 이 책은 그래프턴이 쓴 영어 원고를 <독일 각주의 비극적 기원>이라는 제목으로 독일에서 먼저 번역 출간했다. 그것을 <현학의 비극적 기원>이라는 제목으로 프랑스에서 출간한 뒤에야 미국의 하버드 대학교에서 다시 손을 봐 <풋노트>라는 영어 제목의 책이 나왔다. 이 책의 국제적 판권은 프랑스 출판사가 갖고 있으니 최소한 이 책에 관해서는 국적을 말하는 것이 무의미하다.

이 책은 랑케를 비롯한 독일의 역사가들에게서 각주가 생성되고 변형되는 과정을 추적한다. 오늘날 역사가를 포함한 학자들은 각주를 만들거나 이용할 때 어느 정도 정형화된 틀 속에서 그 일을 한다. 그러나 학문적 정직성을 보장하는 작은 장치로만 간주해온 그 각주도 관련된 사람들의 정치적 성향, 종교, 학문적 경향, 연구 분야에 따라 작성이나 이용 방법이 달랐고, 때로는 그 다양한 양상끼리 대립하고 투쟁하기까지 했다. 정반합의 변증법은 각주의 세계에서도 엄연한 현실이었으며, 이 책은 그것을 세밀하게 추적한다.

이번에 출간된 이 책을 통해 학문적 엄정성이라는 원칙이 어떻게 확립되었는지 확인하는 것도 표절에 둔감한 이곳 풍토에서는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다. 그뿐 아니라 역사 교과서 국정화 문제, 고대사 논쟁, 위안부 서술 문제 등등 역사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크지만 그에 훨씬 못 미치는 학문적 엄정성의 기준에 대한 인식에도 도움이 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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