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인류학자·연세대 명예교수 마포 석유비축기지가 ‘사피엔스’의 오래된 미래가 가능하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발신하는 빛나는 장소로 태어나기 바란다. 지금 비축해야 할 것은 지구 위 생명들이 살아갈 공기와 물, 그리고 상부상조의 ‘비빌 기지’라 말하는 현명한 청년들이 곁에 있어 참 다행이다. 열대야로 잠을 설친다. 고층 아파트 주민들은 밤새 에어컨을 틀어놓지 않을 수 없다고 한다. 기온이 3℃ 상승하면 식물들부터 죽어갈 것이라고 하는데 찬물 샤워로 견뎌야지. 손주들 살아갈 날 생각하면 어떻게든 탄소 배출을 않고 지낼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작년에 어렵게 합의를 본 파리기후협약은 정치 쇼였을 뿐인가? 24시간 에어컨 가동해야 하는 여름, 내내 보일러를 가동해야 하는 겨울, 대기 오염으로 숨쉬기가 힘든 잿빛의 봄, 분노 조절이 안 되는 시민들을 양산하는 아파트 왕국, 서울은 포기해야 할 도시일까? 베란다 화분에서 끈질긴 생명력을 뽐내는 강아지풀이 말한다. 해법이 있다고. 지구를 망치지 않으려는 시민들에게 공터를 돌려주면 된다고. 서울에도 그런 사례가 있다며 월드컵경기장 앞 ‘석유비축기지’에 가보라고 한다. 마포 매봉산 중턱에 위치한 석유비축기지는 국가 위기에 대비한 군사시설이었다. 2000년 초 월드컵경기장 조성으로 용도폐기되었고, 석유를 비운 거대한 탱크가 묻혀 있는 방치된 곳이었다. 1만3천평의 이 땅에 숨결을 불어넣기 시작한 이들은 홍대 앞에서 놀던 청년들이었다. 부동산 투기로 홍대 앞이 급격히 망가지는 것을 보면서 이주할 곳을 찾던 이들이 여기서 삶을 일구기 시작했다. 자급하고 순환하는 삶을 지향하며 뒤엉킨 덩굴을 걷어내 텃밭을 만들고 나눔 부엌과 도서관과 커뮤니티 카페를 차렸다. 소통과 생성의 장소인 공방과 장터도 열었다. 이들은 삶이 재생되는 그곳에 ‘비빌 기지’라는 이름을 주었다. 비빌 기지의 프런티어들은 1990년 전후에 대학을 다닌 ‘문화로 놀이짱’들이다. 스필버그 감독의 <쥬라기 공원>이 벌어들인 수익이 한국 자동차 150만대 판 이익금과 맞먹는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란 이들은 더 이상 선진국 제품을 베끼는 작업이 아니라 고부가가치 상품을 만들 자체 작업이 가능한 세상을 꿈꾸었다. 1990년대 말 국제통화기금(IMF) 위기를 겪으면서 ‘문화’로 나라를 살리리라 마음을 먹었고 2000년대 말 홍대 앞의 수난을 겪으면서 삶의 생산능력과 자립과 자존의 감각을 몸으로 익힌 이들이다. 이곳의 공원화 소식이 들려오던 2014년 즈음 이들의 실험은 독일 베를린의 ‘이행기 공간’들을 둘러보면서 진화해갔다. ‘이행기 공간’이란 기존 방식으로는 답이 안 나온다는 것을 인지한 시 당국이 더불어 살아가려는 시민들에게 도시재생의 실험을 맡긴 실험적 공간을 말한다. 밀려오는 투기자본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는 ‘사회적 경제’의 토대와 상부상조하는 공생의 ‘마을’을 회복하는 것은 제도가 아닌 사람/시민/주민만이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대량생산소비를 중심으로 한 기존 체제가 한계에 도달했음을 감지한 청년들은 7년 동안 수도도 전기도 안 들어오는 빈터에서 때로는 불법 점거 게릴라로, 때로는 시대를 구할 창의 인재로 분열적 대접을 받으며 이행기 공간 실험을 이어갔다. 이 실험을 어떻게 이어갈 것인지에 대한 회의가 이달 중에 열린다고 한다. ‘마포 석유비축기지’ 내 ‘비빌 기지’의 향방을 논의하는 자리이다. 지구를 망가뜨리지 않을 해법을 몸으로 만들어내고 있는 이들은 이제 다음 행보를 위해, 그리고 다음 세대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당당한 요구를 해도 좋을 것 같다. 콘크리트 왕국에 푸르름을 심기 시작한 청년 시민들을 신뢰하고 그들의 실험을 축복하는 것은 서울시의 몫이다. 최근 서울시가 마련한 청년수당도 바로 이런 청년들을 염두에 두고 마련한 것 아니었던가? 7년간 이어져온 이들의 활동은 그간 서울에서 일었던 다양한 시민 주도 움직임들, 사회적 기업과 사회적 경제, 협동조합 운동과 마을 운동의 열매이기도 하다. 이들의 실험이 제대로 이어져 마포 석유비축기지가 ‘사피엔스’의 오래된 미래가 가능하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발신하는 빛나는 장소로 태어나기 바란다. 특히 초고속 경제 성장 후에 더 빠른 속도로 곤두박질하는 동아시아 지역 청년들이 실의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몸을 추스를 마법의 장소가 되어줄 수 있으면 좋겠다. 이미 삶의 전환을 해내고 있는 전 세계 청년들이 모여들어 에너지 자립 게스트하우스를 짓고 획기적인 기술실험을 하면서 지속가능한 삶의 이야기를 쏟아내주기를 기대한다. 지금 비축해야 할 것은 지구 위 생명들이 살아갈 공기와 물, 그리고 상부상조의 ‘비빌 기지’라 말하는 현명한 청년들이 곁에 있어 참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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