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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편집국에서] 한국은 미국보다 4년 먼저 여성 대통령 나왔다 / 권태호

등록 2016-07-31 17:48수정 2016-07-31 21:17

권태호
국제에디터

2012년 12월19일 밤, 박근혜 후보의 대통령 당선 확정 직후 1면 머리기사 제목을 두고 <한겨레> 편집국에서 작은 논란이 있었다. ‘첫 여성 대통령’과 ‘첫 부녀 대통령’, 어느 것을 택하느냐였다. 다음날 <한겨레> 1면 제목은 ‘박근혜 과반 득표…첫 여성 대통령 됐다’였다.

11월8일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힐러리 클린턴이 당선되면 ‘첫 여성’과 ‘첫 부부’ 가운데 어느 쪽을 택할지 논란이 길지 않을 것 같다. 박정희와 빌 클린턴으로부터 박근혜와 힐러리의 독립성 차이 때문이다. 박 대통령은 힘든 결정 앞에 ‘아버지라면 어떻게 했을까’라고 생각한다고 여러 차례 이야기했고, 실제로 새마을운동을 우간다 등 아프리카로 전파하고, ‘불순세력, 국론분열’ 등 요즘 보통사람들은 잘 안 쓰는 1970년대 아버지 시절 단어를 즐겨 쓰는 등 늘 ‘아버지’와의 일체화를 유지했다.

힐러리는 국무장관 시절, 콩고의 한 대학생이 미국 외교정책에 대한 빌 클린턴의 의견을 묻자, “남편은 국무장관이 아니다. 내가 장관이다. 나는 내 남편의 의견을 전달하진 않겠다”고 잘랐다. 이보다 앞서 결혼 뒤에도 한동안 그는 남편 성 대신 ‘로댐’이라는 결혼 전 성을 그대로 썼고, 주지사 부인이 되어서도 변호사 직업을 유지했다. 힐러리가 남편 없이도 대통령 후보가 될 수 있었을까 생각해보지만, 그의 삶에는 남편을 훨씬 능가하는 치열함이 배어 있다. 이는 사람 좋아 보이는 ‘빌’에 비해 그가 더 독하기 때문이 아니라, 아마 빌은 겪지 않아도 되었던 일들을 그는 훨씬 많이 겪어야 했기 때문일 것이다.

힐러리는 ‘이기적이다’, ‘계산적이다’, ‘말과 행동이 다르다’는 말을 많이 듣고 또 상당 부분 사실에 부합한다. 하지만 힐러리가 남성이었어도 이런 비판이 끊이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가끔 한다. ‘유리천장’ 개념을 아마 나 같은 남자들은 아무리 애써도 느끼지 못할 것이다. 버락 오바마가 <내 아버지로부터의 꿈>에서 백인과 흑인의 차이점에 대해 ‘눈 뜨고 있는 매순간 자신의 인종을 의식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런 느낌일까?

<허핑턴 포스트>가 소개한 힐러리 명언 중 “여성들은 딜레마에 처하곤 한다. 한편으론 똑똑하게 자립해야 한다. 반면, 아무도 언짢게 하지 말고 누구의 발도 밟지 말아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자기주장이 강하다는 이유로 아무도 안 좋아하는 사람이 되어 버린다”는 말이 있다. 어떤 삶을 거쳐왔는지 짐작하게 해준다. 힐러리는 국무장관 시절 종종 졸음을 깨우기 위해 “아주 매운 타이 고추를 씹는다. 정신이 번쩍 든다”고 했다. 그의 오늘은 남편 덕이 아니다.

박근혜 후보가 대통령이 되었을 때, 본인 의사와 상관없이 남녀평등에 상당한 기여를 하리라 생각했다. ‘대통령이 여성인 게 자연스러운 세상’ 말이다. 그런데 최근 만난 더불어민주당의 한 다선 여성 의원은 “여성 리더십에 대한 이미지를 너무 많이 훼손해 다음 여성 대통령이 나오는 걸 더 어렵게 만들었다”고 한탄했다. 박 대통령의 대선 구호는 ‘준비된 여성 대통령’이었다. ‘준비’되었는지 잘 모르겠고, ‘여성’임을 인식하는지도 잘 모르겠다. 박근혜 정부에서 여성부를 제외한 여성 장관은 윤진숙 전 해양수산부 장관 단 1명이었다. 이명박 정부도 보건복지부, 환경부 등 3명(여성부 제외)이었다. 김영삼 정부 때도 교육부, 보건복지부, 환경부 등 4명이었다. 박 대통령은 ‘오직 능력만 보고 뽑는다’고 했다. 여성들은 박근혜 정부 들어 무능해진 건가?

힐러리가 대통령이 되길 바란다. 도널드 트럼프를 견딜 수 없기 때문이지만, 그가 주창하는 ‘소수자 보호, 다양성 존중, 중산층 회복’ 등의 가치는 전세계가 지향할 지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딸의 아빠다.

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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