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헌을 기다릴 이유가 없다. 지금 당장 국민들에게 국회가 중심이 된 정치의 진가를 보여줄 기회가 있다. 더불어민주당, 국민의당, 정의당이 노동계, 시민단체가 제시하는 최저임금제도 개혁 방안을 입법하면 된다. 장담한다. 이 입법이 성사되는 순간, 정치의 중심은 돌이킬 수 없이 국회로 넘어갈 것이다.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기획위원 미국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을 정치 혁명 무대로 만든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이 자서전에서 업적 중 첫 번째로 든 것은 최저임금 인상이다. 그는 하원 등원 첫해인 1993년에 최저임금을 인상하고 물가상승률과 연동시키는 법안을 제출했다. 1995년에 이 법안은 찬성 354 대 반대 72로 통과됐다. 보수적인 공화당 의원들조차 공개적으로 최저임금 인상에 반대하기는 쉽지 않았다. 이런 대중정치의 속성을 지혜롭게 활용한 덕분에 샌더스는 원내 유일 무소속 의원이었음에도 최저임금 인상을 관철시킬 수 있었다. 지난 16일 최저임금위원회는 2017년 최저임금을 결정했다. 예년과 다름없이 전년도 시급 6030원에서 6470원으로 소폭 인상에 그쳤다. 총선에서 거의 모든 정당이 시급 1만원을 목표로 최저임금을 인상해가겠다고 공약한 게 불과 몇 달 전이었다. 각 당이 이런 공약을 내세울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만큼 최저임금 인상이 거스를 수 없는 민심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최저임금위원회는 이 민심을 철저히 짓밟았다. “한국의 최저임금제도는 죽었다”는 성난 외침이 터져 나오는 게 당연하다. 왜 매년 이런 일이 반복되는가? 최저임금위원회가 여론을 반영하는 통로가 돼야 하는데, 제구실을 못하기 때문이다. 아니, 아예 소통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특히 공익위원제도가 문제다. 최저임금 시행령에 따라 공익위원은 정부가 임명한다. 그러다 보니 다수의 공익위원들이 늘 사용자 편인 역대 정부의 거수기 노릇을 해왔다. 이들이 사용자 대표들과 함께 거대한 장벽으로 버티는 한, 최저임금 인상을 통한 국민 소득 개선은 요원하다. 장애물이 무엇인지 너무도 분명하므로 실은 개선책이 무엇인지도 논란의 여지가 없다. 현 최저임금위원회 구조 안에서는 무엇보다 공익위원 임명 방식을 바꿔야 한다. 다른 한편 최저임금제도를 더 큰 대의정치 무대와 직접 연결시켜야 한다. 샌더스의 사례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바가 있다. 대중의 관심과 열망은 그에 맞는 대중의 공간에서 다뤄져야 한다. 우리에게는 이미 그런 공간이 있다. 국회다. 진보 세력은 오래전부터 이런 방향의 대안들을 주장해왔다. 19일 최저임금위원회 노동자위원들은 올해 최저임금 결정 파행에 반발해 집단 사퇴를 발표하는 기자회견을 했다. 이 자리에서 정의당 이정미 의원은 그간의 대안들을 종합한 ‘최저임금제도 개혁 방안’을 내놓았다. 그 골자는 첫째, 국회가 최저임금의 최저한도를 법률로 정해 최저임금 심의에 하한선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현행 최저임금법의 골격을 유지하면서도 국회를 통해 최저임금을 보다 공개적으로 논의할 수 있게 된다. 둘째는 공익위원제도를 폐지하거나 노동계와 재계가 절반씩 선출하게 한다는 것이다. 셋째는 밀실에서 이뤄지던 최저임금위원회 회의를 투명하게 공개한다는 것이다. 올바른 방향이다. 게다가 각 당의 총선 공약과 20대 국회 의석 분포를 보면, 전망도 나쁘지 않다. 더불어민주당, 국민의당 모두 20대 국회 임기 안에 최저임금 시급 1만원을 달성하겠다고 공약했고, 소속 의원들은 최저임금제도 개혁을 공언하거나 법률 개정안을 속속 제출하고 있다. 20대 국회의 첫 업적으로 최저임금제도 개혁은 충분히 가능하다. 정부의 반대는 더 이상 변명거리가 되지 못한다. 20대 국회가 출범하기도 전에 언론에 대서특필된 의정 과제는 개헌이다. 그리고 그 방향으로 국회 권한을 강화하는 내각책임제 내지는 이원집정부제가 회자된다.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비대위 대표는 ‘독일식 내각책임제’를 강하게 주장한다. 진심으로 이런 미래를 바란다면, 개헌을 기다릴 이유가 없다. 지금 당장 국민들에게 국회가 중심이 된 정치의 진가를 보여줄 기회가 있다. 더불어민주당, 국민의당, 정의당이 노동계, 시민단체가 제시하는 최저임금제도 개혁 방안을 입법하면 된다. 장담한다. 이 입법이 성사되는 순간, 정치의 중심은 돌이킬 수 없이 국회로 넘어갈 것이다. ‘87년 체제’를 끝내자며 뜬구름 잡는 논의나 할 일이 아니다. 대통령이든 헌법이든 바뀔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은 구차한 변명일 뿐이다. 지금과는 전혀 다른 2018년 최저임금 결정 과정과 그 결과로 새 체제의 첫 운을 떼면 된다. 진보정당은 이 단순한 출발이 관철되도록 전력투구해야 한다.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