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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조한욱의 서양사람] 경마장의 죽음

등록 2016-07-21 18:08수정 2016-07-21 21:04

조한욱
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 교수

엡섬 더비는 영국에서 가장 유서 깊은 경마 경기로서 골프와 테니스에서 영국 오픈이 그냥 ‘오픈’이라고 불리는 것처럼 단지 ‘더비’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제는 ‘더비’라는 말이 큰 경마 경기를 가리키는 보통명사로 통용되기도 하니 그 명성이 어느 정도일지 짐작이 간다. 매년 6월 초에 서리주의 엡섬 경마장에서 열리는 이 경주는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되며 세계 곳곳에서 경마 팬들과 그 너머의 관심을 불러 모은다.

1913년 6월4일 엡섬 더비에서 사고가 났다. 한 여성이 트랙에 난입하여 질주하던 말과 부딪혀 쓰러진 것이다. 충돌한 말은 국왕 조지 5세 소유의 앤머였다. 병원으로 호송된 지 나흘 만에 사망한 40대 초반의 여성은 에밀리 데이비슨이라는 여성 참정권을 위해 싸우던 투사였다.

데이비슨은 “말이 아닌 행동”을 구호로 삼으며 여성 참정권 쟁취를 위해 과격한 행동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던 에밀린 팽크허스트가 결성한 ‘여성 사회 정치 연합’의 기준을 훨씬 초과 달성했던 회원이었다. 투석과 방화 등의 혐의로 아홉 차례나 수감되었고, 감옥에서도 단식 투쟁을 벌였다. 당시 단식 투쟁을 벌이는 여성 참정권주의자들에게는 강제로 음식물을 섭취토록 하는 것이 관행이었는데, 데이비슨은 49차례나 그 처사를 당했다.

그런데 왜 그는 말들이 전속력으로 달리는 경마장에 진입했을까? 전에도 감옥에서 투신한 적이 있었다는 이유로 자살의 장소로 그곳을 택했다는 설이 있었다. 그러나 당시에 뉴스 보도를 위해 촬영했던 동영상을 면밀히 관찰한 뒤 사람들은 데이비슨의 목적이 여성 참정권에 대해 대중의 관심을 끌도록 만들기 위해 왕의 말을 일부러 선택했다는 것을 밝혀냈다.

데이비슨은 질주하는 앤머의 굴레에 무엇인가를 부착시키려 하고 있었다. 그것은 여성에게 투표권을 허용하라는 구호를 담은 ‘여성 사회 정치 연합’의 깃발이었다. 그의 묘비에는 “말이 아닌 행동”이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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