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회대 노동아카데미 주임교수 이른 아침 출근 시간에 맞춰 회사 정문 앞 거리에서 홍보선전물을 나눠주고 돌아오는 조합원들이 왁자지껄 노조 사무실에 들어섰다. 사무실을 지키고 있던 노조 간부가 동료에게 묻는다. “어떻게… 전단지는 잘 뿌렸어?” 질문을 받은 노동자가 답한다. “세상에… 홍보물을 얼마나 열심히 뿌렸간디, 손가락에 지문이 다 없어져 버렸다야.” 키가 훌쩍 큰 노동자가 바지 끝자락을 양말 속으로 여며 넣고 안전화 위로 양말을 쭉 당겨 신은 옷차림으로 들어섰다. 2000년 프로야구선수협의회 결성의 주역이었던 심정수 선수의 한때 상징 같았던 차림새다. 동료 노동자가 그의 옷차림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말한다. “오늘 아주 깔~끔하시네.” 키가 큰 노동자가 답한다. “왜? 좋~잖아. 본래 우리 민족에게 친숙한 모내기 복장!” 그 노동자는 홍보물을 나눠주는 일을 하는 날이면 으레 그 차림새로 나온다는 것이다. 노동조합 사무실 문 앞을 지키고 서서 출근하는 동료들이 보일 때마다 큰 목소리로 부르는 간부도 있었다. “여봐! 이리 와 봐. 노조 사무실에 들러서 차라도 한잔 마시고 들어가!” 부름을 받고 들어온 노동자가 노조 사무실에 들어서면서 말한다. “지나가는 사람을 불렀으면, 차라도 한잔 직접 타 보시든가.” 동료를 부른 노동자는 “에이, 괜히 불렀네” 투덜거리면서도 차를 손수 타서 건네준다. 회사 밖에서 열리는 집회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등 사회적 의제를 다루는 ‘정치 파업’에도 조합원 100%가 참가하는 조직이었다. 피치 못할 사정이 생겨 집회나 파업에 참가하지 못하는 조합원은 노동조합 사무실에 들러 사정을 설명하고 미안하다고 몇 번이나 머리를 조아리며 격려금을 놓고 가기도 했다. 이 회사의 노동자들에게는 자신들의 일터가 더 이상 ‘먹고살기 위해 싫은 일을 해야 하는 곳’이 아니었다.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억지로 하는 ‘노동’이 아니라 자신들이 정말로 사회를 변화시키는 ‘역사의 주인’이라는 자부심이 생생히 느껴져, 보는 동안 마음속으로 많이 부러웠다. 내가 기억하는 유성기업 노조의 10년 전쯤 아침 풍경이다. 그 유성기업 노조를 본격적으로 파괴하기 위한 시도가 2011년부터 시작돼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그 와중에 지난 3월17일 주검으로 발견된 한광호씨는 넉 달이 지나도록 아직 장례식을 치르지 못했다. “차가운 냉동고에 누워 있는 내 친구 한광호를 이제는 보내주고 싶다”고 홍종인 지회장은 절규했다. 우리에게는 가장 모범적인 노동자들이지만 노동운동을 혐오하는 사람들의 눈에는 이들 역시 한낱 “이른바 직업적 전문 시위꾼”(정진석 새누리당 원내대표)으로 보였을 것이다.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이른바 기득권 세력’의 눈에는 사회운동에 참여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전문 시위꾼’처럼 보였을 것이다. 쌍용차 정리해고 투쟁을 하는 노동자들도, 세월호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유가족들도,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수요집회’를 하는 시민들도, 최저임금 시간당 1만원을 요구하는 청년들도, 차별 철폐 투쟁을 하는 장애인들도 모두 사회 지배 세력의 눈에는 ‘전문 시위꾼’으로 보였을 것이다. 같은 문제를 바라보는 생각은 이처럼 극단적으로 다르다. “서는 데가 바뀌면 풍경도 달라진다.” 과연 어느 쪽의 생각이 옳은 것일까?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은 대략 두 가지다. 첫째, 긴 호흡으로 볼 때 인류 사회가 점차 어느 방향을 지향하고 있는가를 살피는 것이다. 둘째, 흔히 ‘선진국’이라 불리는 다른 나라들의 경우에는 어떠한지 살펴보는 것이다.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인류 사회가 많은 우여곡절을 거치면서도 점차 사회적 약자의 권리를 강화하고 보호하는 방향으로 발전해왔다는 것이고, 다른 많은 나라들 역시 점차 그러한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현실에서는 계속 탄압받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의 주장이 점차 실현되는 방향으로 인류 사회가 끊임없이 발전해온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일터를 빼앗긴 노동자들과 가족을 잃은 유가족들과 역사를 바로 세우고 싶어 하는 시민들과 인간의 품위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최저기준을 높이고 싶어 하는 청년들과 차별받기를 원치 않은 장애인들의 ‘인간답게 살고 싶은’ 욕구를 영원히 억누를 수 있는 힘은 지구상 어디에도 존재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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