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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서양사람] 어떤 투사 / 조한욱

등록 2016-06-30 18:23수정 2016-06-30 19:26

조한욱
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 교수

질 아일랜드는 영국 출신의 영화배우였다. 단역으로만 출연하며 빛을 보지 못하던 그는 데이비드 매컬럼과 결혼한 뒤 이름을 널리 알릴 수 있었다. 매컬럼은 1960년대의 텔레비전 시리즈물 <0011 나폴레옹 솔로>에서 러시아계 첩보원 일리아 쿠리아킨의 배역으로 당대의 섹스심벌로 떠오르며 인기몰이를 하던 중이었다. 이후 아일랜드는 그 프로그램에 네 번 출연했다. 그들 사이에서 두 아들이 태어났는데, 그들은 사내아이 하나를 더 입양했다.

아일랜드는 매컬럼과 이혼한 뒤 찰스 브론슨과 결혼했다. 아일랜드는 브론슨이 출연한 영화에서 브론슨의 상대역을 맡음으로써 배우의 명맥을 유지했다. 브론슨은 주로 냉혹한 킬러의 배역을 맡았는데, 어떤 여배우도 그의 상대역을 하지 않으려 해 어쩔 수 없이 자신이 그 일을 했을 뿐이라고 항변했다.

그 변변치 못한 영화계의 경력을 말하려고 질 아일랜드를 거론하는 것이 아니다. 영화배우로서 어떤 역할보다 실제 삶 속의 그가 훨씬 빛나고 감동적이었다. 아일랜드는 1984년에 유방암 판정을 받았다. 그는 암과 싸운 투병기를 두 권의 책으로 펴냈다. ‘미국 암 협회’의 대변인으로 그 위험성을 널리 홍보했고, 국회에서 암의 치료비용에 대해 증언하기도 했다.

그런 그에게 1989년 또다시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3년 만에 재발한 암이 이번에는 폐로 전이되었던 것이다. 기껏해야 2년 연명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 최후의 선고였다. 낙담했지만 그는 남은 기간을 소중하게 보내기로 결심했다. 입양한 아들도 약물과 알코올 중독으로 사경을 헤맸다. 그는 자신보다 여섯 달 먼저 사망한 그 아들의 투병도 상세하게 기록했다. 자신의 병에 대해서는 세 번째 투병기를 미완으로 남겨놓고 사망했다.

“내 장례식장엔 풍선과 샴페인을 갖추세요. 모두 밝고 환하게 내 삶을 기념하는 축제를 즐기도록 해요.” 그는 끝까지 암의 희생자가 아니라 암에 저항하는 투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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