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이맘때까지 1년가량 영국을 경험할 기회가 없었더라면, 영국이 유럽연합을 떠나든 말든 그 나라 사람들의 선택이니 그 사람들이 감당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미국이나 중국이 감기에 걸리면 우리나라 경제는 폐렴을 앓을 수도 있지만, 영국이 내일 당장 망한다고 하더라도 수천 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한국 신문사의 직원이 먹고사는 데에 무슨 악영향을 끼치겠느냐면서.
영국 중북부의 셰필드라는 도시에 머문 동안, 2014년 스코틀랜드 독립투표 부결과 지난해 5월 여론조사의 예상을 뒤엎고 보수당이 압승하는 것을 지켜봤다. 나름 국제문제를 포함해 정치·경제에 관심이 많은, 혹은 많아야 할 내게 당시 가장 민감한 문제는 환율이었다. 여느 유학생들과 마찬가지로 ‘그래서 환율이 어떻게 되는데?’가 최대 관심사였다.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의 재집권이 유력하다는 출구조사 직후 미친 듯이 오르는 파운드화 환율을 보면서 노동당을 원망하며 술을 마셨다. 극우 성향의 영국독립당(UKIP)이 전국적으로 13% 가까이 득표하고도 실제 의석은 전체 650석 가운데 단 한 석을 차지하는 데에 그친 안도감은 그다음이었다. 달러는 이번 브렉시트(Brexit) 후폭풍에도 원화 대비 몇십원 움직이는 데에 그친 반면, 파운드는 굵직한 이슈에 몇백원 단위로 진폭을 오간다. 아르바이트를 하더라도 집에 손을 벌려야 하는 유학생들처럼, 나도 환율을 따라 같이 울고 웃었다. 그렇게 ‘먹고사니즘’은 힘이 세다.
영국 유권자 다수가 유럽연합 탈퇴에 표를 던진 것이 먹고사니즘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다. 과거에 비해 복지가 줄어들고 먹고살기가 팍팍해져서 변화를 택한 것이라는 얘기다. 한편으론 이해가 가면서도 과녁을 잘못 짚은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 2012년 런던올림픽에서 영국을 자랑하는 몇 가지 가운데 하나의 상징으로 등장했던 국가보건서비스(NHS: National Health Service)의 혜택은 지속적으로 줄어들었다. 나라가 책임지던 무상교육을 벗어난 대학 학자금은 최근 몇 년 사이 치솟았다. 중동과 동유럽, 아시아 등지에서 온 이민자들이 늘면서 실제 일자리를 뺏긴 사람도 있을 수 있다. 불편해도 고수해온 전통적인 삶의 방식이 뒤틀리는 낯선 경험을 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런데 과거에 비해 삶이 팍팍해진 이유가 정말 유럽연합에 가입해서, 혹은 이민자들이 늘어서일까. 부자들이 더 많은 돈을 쉽게 벌 수 있는 문을 열어줘 결과적으로 불평등이 심해진 세계적 흐름과 영국은 무관할까.
영국의 결정이 더 이상 남 일 같지 않은 이유는 그 1년 동안 맺은 인연 때문이다. 집을 빌려준 무뚝뚝한 주인, 홍차의 웅숭깊은 맛을 알려준 카페 주인, 셰필드에서 제2의 삶을 살고 있는 이들이 겪을 신산함이 걱정된다. 선거권이 없어 이번 투표에 참여하지 못했으면서 오롯이 그 무게를 짊어질 젊은 친구들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올 여름방학 때 딸아이의 영국인 친구가 3주가량 우리 집에 머문다. 지하철 안전문을 고치다가 혹은 에어컨을 수리하다가 죽어나가는 노동자가 흔한, 그나마 그런 일자리도 흔치 않은 ‘헬조선’과, 더 이상 ‘그레이트브리튼’이 아닌 ‘리틀 잉글랜드’ 시민으로 살게 될 여린 젊은벗들이 만나서 나누게 될 현재와 미래는 어떨까. “우리, 앞으로, 무엇을 하면서, 어떻게 살지?”라는 이야기가 장마철 곧 쏟아부을 것 같은 먹구름 빛깔일 것 같아 벌써부터 미안해진다. 오늘 저녁 두 분 모두 간호사인 그 친구 부모님께 메일을 보내야겠다. 숟가락 하나 더 얹어도 부담스럽지 않을 살림살이는 되니 그냥 비행기만 태워 보내시라고.
김보협 디지털 에디터 bh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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