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6년 6월23일 영국 런던 왕립원예회관의 린들리 홀에서 유럽연합 탈퇴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 뒤 웨스트민스터시와 런던시의 투표용지가 개표되고 있다. EPA 연합
큼직한 글씨가 새겨진 붉은색 대형 버스는 흡사 굴러다니는 현수막이었다. ‘유럽연합에 매주 3억5천만 파운드(약 5768억원)를 보낸다. 그 돈을 국가보건서비스(NHS) 재원으로 쓰자’. 그 아래 ‘통제권을 되찾자’는 작은 글귀는 영국의 ‘잃어버린’ 국경과 예산의 통제권을 회복해야 한다는 의미로 읽혔다. 2016년 영국 전역을 누빈 이른바 ‘브렉시트(Brexit) 버스’의 캠페인 문구다. 버스는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를 지지하는 쪽에서 운영했다. 나중에 외무장관을 거쳐 총리까지 지낸 보리스 존슨은 그해 6월 실시한 국민투표에 앞서 이 버스를 타고 이동하면서 탈퇴 캠페인을 주도했다.
유럽연합 탈퇴 쪽이 다수가 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받는 브렉시트 버스의 주장은 거짓이었다. 주당 3.5억 파운드는 가난한 지역과 농업을 보조하거나 과학 연구를 위해 영국이 유럽연합으로부터 지원받는 금액을 빼면 주당 1억3600만 파운드로 준다. 5억명이 넘는 유럽연합 가입에서 얻는 무역 효과 등을 고려하지 않더라도 브렉시트 버스에 붙은 수치는 과장으로 판명이 났다.
투표를 불과 며칠 앞두고 공개된 또 한장의 강렬한 사진도 유럽연합 ‘탈퇴파’의 승리에 빼놓을 수 없는 요인이었다. 수천명의 이민자 행렬 위 붉은 글씨로 ‘한계점’이라고 썼다. 그 아래 작게 ‘EU 때문에 우리가 모두 실패했다’, ‘EU에서 벗어나 국경의 통제권을 되찾아야 한다’고 적었다. 영국인들이 겪는 사회경제적 어려움이 통제권을 잃어버린 국경을 통해 밀려드는 이민과 난민 때문이며 더는 놔둘 수 없는 임계점에 이르렀다는 메시지를 뿜어낸다. 포스터의 배경은 전년도 슬로베니아에서 국경을 넘어 마케도니아로 향하는 난민 행렬이었다. 영국 독립당(UKIP)의 나이절 패라지 대표가 공개한 이 포스트는 인종적 증오와 혐오를 부추긴다는 비판을 받았지만 영국 순이주자(유입에서 유출을 뺌)가 한 해 33만3천명에 이른다는 숫자와 겹쳐 이민자 쓰나미가 덮칠 수 있다는 두려움을 빚어냈다. 그는 이민자 문제를 테러와 안보, 심지어 성폭력 사건 등과 엮어 두려움을 조장하는 투표 캠페인을 벌였다. 이민자는 공동체를 위협하는 ‘적’이었다.
과장된 수치를 동원하거나 혐오를 빚어내는 가짜뉴스 캠페인은 탈퇴파의 의도대로 ‘성공적’이었다. 그해 영국은 43년 만에 유럽연합에서 탈퇴했다.
지난 19일 한상원 충북대 교수(철학)는 참여연대 부설 참여사회연구소와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이 ‘한국정치와 적대주의: 이해와 해법의 모색’을 주제로 공동 주최한 토론회에서 발제자로 나서 “뉴미디어를 타고 급속도로 확산하는 가짜뉴스는 오늘날 민주주의가 처한 위기 현상을 극명하게 드러낸다”며 “반지성주의적 태도의 확산은 이러한 가짜뉴스에 의한 민주주의 파괴에 대해 해당 정치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저항할 수 있는 능력을 부식시켜버린다”고 말했다.
말레이시아를 거쳐 제주도로 들어온 예멘 난민 알수가가 지난 2018년 6월18일 제주 출입국청사 로비에서 법무부에서 배포한 서류를 들고 동료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박승화 기자
반지성주의 확산은 전 세계적이며 우리나라 또한 예외가 아니다. 반이슬람 정서와 맞물린 예멘 난민을 향한 적대감, 여성과 소수자의 권리를 불공정으로 비난하는 ‘이대남’(20대 남성) 현상, 팬데믹 기간 ‘혐중’ 정서에서도 공통으로 찾아볼 수 있다. 이는 갈등을 증폭시키고 민주주의를 위협한다. 한상원 교수는 ‘탈진실’(Post-truth)의 정치를 빚는 반지성주의적 태도가 “알고 싶지 않은 지식을 차단함으로써 토론을 거부하는 태도로 이어져 공론장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소수자에 대한 편견 등 기존 사회에 확산한 차별적 의식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다고 말한다. 반지성주의의 확산과 가짜뉴스의 범람은 동전의 앞뒷면처럼 쌍을 이룬다.
브렉시트 버스에 새겨진 수치는 영국 통계청과 경제 전문가 그리고 권위 있는 언론의 계속된 팩트체크에도 불구하고 많은 영국인에게 사실로 굳어졌다. 지난 2018년 킹스칼리지런던 정책연구소가 발표한 연구 결과를 보면, 브렉시트 버스의 주장이 통계의 오용이라는 딱지가 붙었음에도 그 주장을 접한 사람의 42%가 사실이라고 믿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유럽연합 출신 이민자들이 복지 혜택과 서비스로 받는 것보다 세금으로 내는 게 47억 파운드 더 많지만 이를 제대로 아는 영국인은 적었다. 다수는 이민자 때문에 범죄율이 높아졌다거나 그들로 인해 의료 서비스의 품질이 떨어지고, 저숙련 근로자 실업률이 증가했다고 생각했다. 근거 없는 이러한 잘못된 인식은 브렉시트 지지자에게서 더욱 심하게 나타났다. 특히 영국 내 유럽연합에서 온 이민자 비율이 인구의 6%에 그치는데도 시민 다수는 그 비율이 3배 이상 높은 16%에 이른다고 믿었다.
실제보다 부풀려진 이민자는 공동체의 일자리를 뺏고 범죄율을 높이는 위험하면서도 세금을 축내는 게으른 존재로 비치는 것이다. 그 바탕에 잘 모르는 타자에 대한 불안과 공동체의 정체성이 훼손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깔렸다. 이는 영국만이 아니라 유럽과 미국, 한국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이런 토양에서 가짜뉴스와 결합한 차별과 혐오 정서는 증폭된다.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서구에서 중국인을 비롯한 아시아인은 바이러스 전파자로 지목됐고 아시아계 출신 이민자 대상으로 한 살인과 폭력 등 증오 범죄로 번졌다. 혐오 정서는 ‘코로나 인종주의’처럼 극단적 폭력의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이는 자칫 정치 공동체의 붕괴를 불러올 수도 있다.
지난 2016년 5월11일 영국 콘월 세인트 오스텔에 도착한 이른바 ‘브렉시트 버스’의 모습. 보리스 존슨 전 총리는 버스를 타고 전국을 순회하며 브렉시트 캠페인을 지원했다. EPA 연합
반지성주의의 폐해는 문제의 진짜 원인을 은폐한다. 반지성주의적 태도는 사회 내부 모순에 대한 인식과 자기 성찰을 불가능하게 한다. 이대남 현상을 예로 들 수 있다. 한상원 교수는 이른바 이대남의 불만과 분노, 절망감의 표출을 ‘허위적 적대’ 개념으로 설명한다. 이는 쉽게 말해 적대의 잘못된 번지수를 가리킨다. 분노가 문제의 원인 제공자가 아닌 엉뚱하게도 약자와 소수자로 옮겨가는 ‘적대의 전이’라 할 수 있다. “징병제에 대한 불만, 과도한 경쟁과 부족한 일자리로 인한 청년 세대의 불안정 등 그들이 갖는 불만의 많은 부분은 구조적 원인에서 기인한다. 그러나 불만은 청년층 남성에게 강제복무를 강요하는 군사주의화한 국가나 불평등과 불안정을 낳는 신자유주의 경제질서에 대한 문제 제기로 이어지지 않는다. 이를 대체하는 허위적 적대의 출현을 통해 분노가 여성과 장애인 등 약자를 향해 굴절된다.”(한상원)
그렇다면 반지성주의적 태도와 맞물린 적대주의 정치를 조장하는 가짜뉴스에 맞서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비판적 능력을 키우는 미디어 리터러시(문해력)를 강화하는 게 답일까.
이날 토론회에서 발제를 맡은 김현 연세대 정치학과 BK21 교육연구단 박사는 “시민들이 단순히 정보를 잘 몰라서가 아니라 자신의 세계관에 부합하는 정보를 찾고 있기 때문에 허위 정보를 받아들인다”고 말했다. 그는 가짜뉴스를 밑거름 삼아 적대주의 정치가 강화되는 까닭은 대중의 비판 능력 결여가 아닌 정서적 동조에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는 킹스칼리지런던의 5년 전 연구 결과와도 일맥상통한다. 연구 책임자 보비 더피 킹스칼리지런던 정책연구소 소장은 당시 “대중은 여전히 엄청난 양의 잘못된 정보를 얻고 있다. 이러한 잘못된 인식은 팩트에 대한 무지나 제대로 안내받지 못해서만이 아니다. 그보다는 감정적인 문제다. 단지 증거에 기반을 둔 설명으로 브렉시트에 대한 사람들의 견해를 바꾸려는 시도는 충분하지 않을뿐더러 요점을 놓치게 된다”고 말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비판 능력에 초점을 맞춘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은 적절하게 기능하지 못하거나 때론 역효과를 초래할 수 있다. 기존 신념을 강화하는 쪽으로 작동하는 ‘필터 버블’이나 ‘확증 편향’은 진실을 뒷받침하는 증거의 부족이나 부재에 있지 않다. 되레 신념에 반하는 증거를 알게 될 때 신념을 바꾸기보다 더욱 굳히는 ‘동조 편향’이 나타나면서 증거의 발화자, 특히 언론을 불신하는 방향을 선택하게 만들 수 있다고 한상원 교수는 지적한다.
지난 19일 참여연대 아름드리홀에서 참여연대 부설 참여사회연구소와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이 ‘한국정치와 적대주의’를 주제로 공동 주최한 토론회 모습. 류이근 기자
토론회에서는 반지성주의와 적대주의 정치 바닥에 깔린 이러한 정서와 감정에 주목해 대안적 접근 방법으로 공통 감각, 공통 정서, 윤리적 시각, 더 많은 접촉 등이 제시됐다. 김현 교수는 적대주의 정치의 팽창에 맞서 “민주적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공통의 감각과 정서를 육성”하는 민주시민교육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적대적 정서에 대항할 수 있도록 하는 대안적 정서를 함양하자는 얘기다. 그는 보다 근본적으로 타인에 대한 ‘돌봄’ 능력과 같은 윤리적 차원의 접근이 필요하다고 본다. 방법론은 다르지만 ‘공통 감각’이라는 목적지는 한상원 교수도 엇비슷하다. 그는 “공동체를 공동체로 만들 수 있는 정서적 결속력, 곧 ‘공동체의 감각’ 창출은 공포라는 집단 정념을 극복할 수 있는 집단지성의 존재를 요청한다”며 “공동체가 위기에 처했을 때 민주주의 주체들은 공통의 지성적 성찰에 참여함으로써 자신이 속한 정치 공동체에 소속감과 결속력, 연대감을 획득할 수 있다”고 말했다.
독일 주간지 ‘디 차이트’가 2017년 시작한 ‘독일이 말한다’(Deutschland Spricht) 실험은 이와 맞닿아 있다. 토론자로 나선 한귀영 사람과디지털연구소 연구위원은 이 주간지 편집장 바스티안 베르브너의 말을 빌려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필터 버블’을 걷어내고 나와 다른 사람과 더 많이 접촉할 때 편견이 줄어들고 극단주의도 약화됐음을 방대한 사회실험이자 대화실험을 통해 보여줬다”며 “차이, 이질적인 것과의 더 많은 접촉이 정치적 분열과 혐오, 편견의 해독제임을 시사한다”고 말했다. ‘한겨레’는 지난 11일 개최한 아시아미래포럼에서 ‘독일이 말한다’의 한국판인 ‘한국의 대화’(Korea Talks)를 통해 관점이 다른 두 사람이 만나 친구가 될 수 있는지 국내에서 처음 실험했다. 둘 다 공통 감각이나 정서로까지 나아가지는 않더라도 정치적 적대주의나 극단주의의 자양분이 되는 소외감과 고립감을 겪는 개인들의 상호 ‘접촉’면을 넓히는 시도다.
지난 9월23일 오후 서울 종로구 인사동 코트에서 한겨레·빠띠 주최 ‘한국의 대화’에서 참석자들이 진지한 표정으로 1대1 대화를 나누고 있다. 빠띠 제공
박권일 작가는 토론자로 나서 커뮤니케이션 기술 발달의 역설을 지적했다. 그는 “오늘날 평범한 사람들, 민주주의 체제의 주권자인 대중이 점점 공적 사안으로부터 멀어진 게 단지 엘리트의 의도적 배제에만 기인하는 것이 아니다. 공적 사안에 대한 논의가 많은 시간과 인지 자원을 요구하는 데 비해 대다수 유권자는 정작 그럴 만한 시간적, 인지적 여유를 확보하기 어렵다. 이슈에 대한 찬반투표가 늘어났을지 몰라도 토론과 합의 문화는 되레 희소해지고 있다”는 현실에 주목했다. 그는 이런 커뮤니케이션 환경에 어떻게 대응하느냐가 적대주의와 반지성주의를 극복하는 데 중요하게 고려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날 토론회에서 이승원 서울대아시아연구소 전임연구원은 ‘정치의 회복’을 제안했다. 그는 “대의제의 한계를 인정하면서, 대의제가 감당하지 못하는 정치 영역, 즉 그동안 억눌려 있던 시민의 직접 정치와 시민 주도 정치 영역을 함께 제자리로 돌리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정치 공간과 기회가 더 크게 열릴 때 반지성주의와 적대주의를 넘어설 수 있는 시민의 집단지성이 활성화할 수 있다고 봤다.
제니퍼 캐시디 옥스퍼드대 교수(외교학)는 ‘민주주의와 가짜뉴스: 탈진실 정치가 2016년 브렉시트 국민투표 결과를 어떻게 변화시키고 형성했는가’란 책에서 이렇게 결론 내린다. “브렉시트 국민투표로 가는 길은 그들의 선택이 실제 어떤 의미를 갖는지 이해하지 못하게 하는 어려운 인식적 장애물로 가득 차 있었다.” 7년 전 가짜뉴스 캠페인에 힘입어 이뤄진 브렉시트로 영국은 어떤 비용을 지불하고 있을까.
류이근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선임기자
ryuyigeu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