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조한욱의 서양사람] 되찾은 명예

등록 2016-06-16 17:33수정 2016-06-16 20:37

‘노예해방령’으로 자유를 얻은 뒤 미국 웨스트포인트의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한 흑인이 있었다. 입학 당시 그곳엔 네 명의 흑인 생도가 있었다. 남북전쟁이 끝난 뒤의 북부 지역이라 할지라도 흑백차별은 엄연히 존재했다. 다른 네 명은 끊임없는 박해를 견디지 못하고 중퇴했기에 헨리 오시안 플리퍼가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장교로 임관된 최초의 흑인이라는 명예를 안았다.

그것은 쉽게 얻은 명예가 아니었다. 그는 자대에 배치받은 뒤 아파치 전쟁을 비롯한 여러 임무를 훌륭하게 수행했다. 그의 상관 놀런 대위는 그런 그를 인격적으로 대하며 저녁 식사에 초대하기도 했다. 딸이 있는 자리에 흑인을 초대한 것을 두고 놀런을 비난하는 수군거림이 있었지만, 놀런은 플리퍼가 “장교이자 신사”일 뿐이라고 일축했다. 놀런 부인의 처제와도 친해져 편지까지 주고받았는데, 그것이 또 백인들의 미움을 샀다.

놀런이 지지하는 한 플리퍼에겐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상관이 바뀌었다. 새 상관은 부하를 괴롭히기로 소문난 사람이었다. 그의 눈 밖에 난 플리퍼는 결국 횡령의 혐의를 뒤집어쓰고 영창에 구금된 뒤 불명예제대를 해야 했다. 그는 그 혐의를 벗기 위해 여생을 바쳤으나 헛수고였다. 미서전쟁이 일어나자 재입대를 신청했으나 그것도 미국 의회에 의해 거절당했다. 결국 그는 불명예 속에 세상을 하직했다.

1976년 그가 사망하고 36년이 지나 후손들이 재심을 청구했다. ‘군사 기록 수정 위원회’는 군법회의의 판결을 뒤집을 권한은 없어도, 그들은 그의 처벌이 지나치게 가혹하고 불공정했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 결과로 불명예제대는 명예제대로 바뀌었다. 그러나 아직 사면은 되지 않았다. 고인일 경우 사면 청원은 기각되는 것이 통상적이었는데, 클린턴 대통령이 이례적으로 그를 사면했다.

이제는 웨스트포인트의 교정에 플리퍼의 흉상이 서 있어, “지도력과 인내심으로 곤경에 맞선 모범”을 후배 생도들에게 보이고 있다.

조한욱 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 교수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내란 청문회’ 증언, 모두 윤석열을 가리킨다 [1월23일 뉴스뷰리핑] 1.

‘내란 청문회’ 증언, 모두 윤석열을 가리킨다 [1월23일 뉴스뷰리핑]

법집행 전면 부정한 ‘폭동’ 배후도 철저히 수사해야 [왜냐면] 2.

법집행 전면 부정한 ‘폭동’ 배후도 철저히 수사해야 [왜냐면]

윤석열, 군·경호처도 검사처럼 무한 복종할 줄 알았나 3.

윤석열, 군·경호처도 검사처럼 무한 복종할 줄 알았나

문제는 윤석열이 아니다 [김누리 칼럼] 4.

문제는 윤석열이 아니다 [김누리 칼럼]

‘트랜스젠더 혐오’ 트럼프 속내 [한채윤의 비 온 뒤 무지개] 5.

‘트랜스젠더 혐오’ 트럼프 속내 [한채윤의 비 온 뒤 무지개]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