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해방령’으로 자유를 얻은 뒤 미국 웨스트포인트의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한 흑인이 있었다. 입학 당시 그곳엔 네 명의 흑인 생도가 있었다. 남북전쟁이 끝난 뒤의 북부 지역이라 할지라도 흑백차별은 엄연히 존재했다. 다른 네 명은 끊임없는 박해를 견디지 못하고 중퇴했기에 헨리 오시안 플리퍼가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장교로 임관된 최초의 흑인이라는 명예를 안았다.
그것은 쉽게 얻은 명예가 아니었다. 그는 자대에 배치받은 뒤 아파치 전쟁을 비롯한 여러 임무를 훌륭하게 수행했다. 그의 상관 놀런 대위는 그런 그를 인격적으로 대하며 저녁 식사에 초대하기도 했다. 딸이 있는 자리에 흑인을 초대한 것을 두고 놀런을 비난하는 수군거림이 있었지만, 놀런은 플리퍼가 “장교이자 신사”일 뿐이라고 일축했다. 놀런 부인의 처제와도 친해져 편지까지 주고받았는데, 그것이 또 백인들의 미움을 샀다.
놀런이 지지하는 한 플리퍼에겐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상관이 바뀌었다. 새 상관은 부하를 괴롭히기로 소문난 사람이었다. 그의 눈 밖에 난 플리퍼는 결국 횡령의 혐의를 뒤집어쓰고 영창에 구금된 뒤 불명예제대를 해야 했다. 그는 그 혐의를 벗기 위해 여생을 바쳤으나 헛수고였다. 미서전쟁이 일어나자 재입대를 신청했으나 그것도 미국 의회에 의해 거절당했다. 결국 그는 불명예 속에 세상을 하직했다.
1976년 그가 사망하고 36년이 지나 후손들이 재심을 청구했다. ‘군사 기록 수정 위원회’는 군법회의의 판결을 뒤집을 권한은 없어도, 그들은 그의 처벌이 지나치게 가혹하고 불공정했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 결과로 불명예제대는 명예제대로 바뀌었다. 그러나 아직 사면은 되지 않았다. 고인일 경우 사면 청원은 기각되는 것이 통상적이었는데, 클린턴 대통령이 이례적으로 그를 사면했다.
이제는 웨스트포인트의 교정에 플리퍼의 흉상이 서 있어, “지도력과 인내심으로 곤경에 맞선 모범”을 후배 생도들에게 보이고 있다.
조한욱 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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