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6년 1월10일, 영국 런던 웨스트민스터 중앙홀에 51개 국가의 대표가 모였다. 더 이상 전쟁을 반복해서는 안 된다는 사명 아래 국제연합(유엔)이라는 정부간 국제기구의 첫 총회를 개최한 것이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창립한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은 국제협력을 통한 전쟁 방지라는 인류의 이상을 이루지 못했다. 2차 세계대전은 그 이전의 모든 전쟁을 합친 것보다 더 잔인했다. 그러나 전쟁을 방지하고 영구적인 평화를 달성하고자 하는 유토피안적인 꿈을 포기하지 않은 인류는 “국제 평화와 안전의 수호, 평등·자결 원칙 존중, 차별 없는 인권과 기본적 자유권 존중·장려”의 국제정치를 실현할 기구를 갈망했고 그것이 바로 유엔이었다. 따라서 유엔의 1차 총회는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국제사회의 이상을 실현할 유엔의 내실화가 무엇보다도 급선무였다. 이 1차 총회에서 안전보장이사회와 국제사법재판소(ICJ)가 설치되었다. 국제안보의 주요사안은 안전보장이사회를 통해 협의하겠다는 다자협력의 꿈을 제도화하였고, 국제법의 준엄한 권위와 구속력을 국제사법재판소를 통해 실현하겠다는 이상을 현실화한 것이다.
또한 유엔의 이상과 권위를 실무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는 행정조직이 필요하였다. 총회는 제5위원회로 하여금 유엔의 예산과 행정에 관한 규정을 정비하게 하였다. 당시, 유엔의 창립자들은 행정조직의 수석행정원을 사무총장(Secretary General)이라 칭하였고, 이 직책의 목적, 업무 범위 그리고 퇴임 이후의 행보까지 명확히 했다. 유엔 헌장 97조에는 유엔 사무총장이 “각국의 활동을 조화시키는 중심”에 있다고 정치적 위상을 높였지만 “국제공무원으로서의 지위를 손상할 우려가 있는 어떠한 행동도 삼간다”라는 조항을 헌장 100조에 두었다. 이를 바탕으로 제5위원회는 유엔 사무총장에 관한 정밀한 단서 조항들을 총회에 건의한다. 사무총장은 특정 회원국의 이해에 영향을 받거나 주어서는 안 된다는 규정과 함께, 오직 유엔의 이익을 위해 처신해야 한다는 자기 제한 규정을 명확히 했다. 특히 유엔이 국가간 이해와 오해를 조정해야 할 정부간 국제기구가 되어야 한다는 이상을 믿었던 제5위원회는 “사무총장이 보유한 회원국의 비밀정보가 많은 정부를 당혹스럽게 할 수 있는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을 명확히 했고, “퇴임 이후 회원국으로부터 정부 직책을 수락하는 것을 삼가야 한다”고 강력히 권고했다. 이것이 바로 1946년 1월24일 유엔 사무총장의 임기, 보수 등과 관련해 유엔의 첫 총회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된 유엔 결의안 11(1)호인 것이다.
세월이 70년이 흘렀다. 여전히 유엔이 강대국의 이익을 대변할 뿐, 독자적 영향력이 없다고 주장하는 시각이 존재한다. 그러나 아무리 국제정치 환경이 험하여도 주권 존중, 인권 향상, 기후변화 대응, 국제법의 귄위, 분쟁 조정, 평화 유지, 질병 방지 등과 같은 유엔의 꿈은 예전보다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해졌다. 지난 70년간 유엔의 꿈을 수호한 8명의 사무총장이 있었다. 그들은 유엔의 1차 총회가 통과시킨 유엔 결의안 11(1)호를 위반하지 않았다. 물론 사무총장 임기 이후 자국의 대통령이나 총리가 된 경우가 있지만 평균 5년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세상은 반기문 사무총장의 꿈에 대해 궁금해한다. 그의 대선 출마설이 정계를 흔든다. 그것을 즐기는 듯한 반 총장의 꿈과 유엔의 꿈은 상당히 다르다. 반 총장의 꿈이 1946년 유엔의 꿈을 믿었던 사람들을 배신하지 않기 바란다. 한국 외교가 배출한 최고의 외교관이 한국 정치판 한가운데서 몰매를 맞는 모습은 슬픈 광경이 될 것이다.
최종건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언니가 보고있다 #20_반기문의 ‘구직 활동’, 성공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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