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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김소연의 볼록렌즈] 약속

등록 2016-05-25 21:00

끝내지 못한 원고 때문에 연일 약속을 취소하며 지낸다. 만나려던 사람들이 해도 너무한다며 실망하는 게 등 뒤에서 느껴질 지경이다. 약속 취소를 문자메시지로 주고받다 보니, 이틀 동안 말이라는 것을 입 바깥으로 꺼낸 것은 집 앞 과일가게에서 토마토를 살 때가 다였다. 써내려가던 원고를 뒤엎고 새 파일을 꺼내어 첫 줄부터 다시 쓰기를 몇 번째다. 친구도 만나지 못한 채 감금되다시피 고독하게 쓰는 글이 무슨 소용인가 싶어진다. 다음 생애엔 사람들과 복작거리는 직업을 선택해서 매일매일 사람들 얼굴을 마주하며 살고 싶다는 생각과 함께 사람들을 매일매일 만나 부대끼며 지을 내 표정이 떠오르고서야 엄살을 멈추고 고쳐 앉아 다시 원고를 쓴다. ‘그래도 너는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살잖니’ 하고 말할 어린 시절 친구 얼굴도 떠오르는 것이다. 문장이 멈출 때마다 탁상달력 속 동그라미 쳐진 다음주의 약속들을 바라본다. 힘을 얻고 다시 원고를 쓴다. 내일들에 약속이라는 게 없다면, 내일은 어제나 오늘과 똑같은 느낌일 것이다. 약속이 있어서 오늘의 괴로움이 참을 만해진다. 약속을 펑크내거나 미루는 건 타인의 기대뿐만 아니라 내일을 빼앗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내가 빼앗은 타인의 내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다 헤아릴 수도 없을 지경이지만, 그래서 언젠가부터 이해받지 못하는 이와는 약속을 하는 것조차 두려워진 처지이지만, 또다시 내게 약속을 한다. 약속을 꼭 지키자는 약속을.

김소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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