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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조한욱의 서양사람] 의로운 죽음

등록 2016-05-04 19:54

1821년부터 그리스 독립전쟁이 일어났다. 1453년 오토만 투르크에게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된 이후 그리스 도처에서 독립을 쟁취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이제 민족주의와 자유주의의 새바람이 불었다.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 유럽 열강도 지원했다. 마침내 그리스는 ‘친우회’라는 비밀조직의 주도로 독립을 이루어 1829년에 그리스 왕국이 성립하였다.

에게해 주변의 그리스인들이 환호했으나 키프로스 섬에서는 사정이 달랐다. 역사에서 때로는 인간적 동기보다 지정학적 조건이 더 중요하다. 키프로스가 그러했다. 키프리아노스는 키프로스 정교의 대주교로서 그가 세운 그 섬 최초의 중등학교는 아직도 수도 니코시아의 대주교좌 건물 앞에 서있다. 그에게 그리스 ‘친우회’ 소속의 입실란티스가 찾아가 함께 무장 항쟁에 나서자고 권했다.

대주교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명분에는 동의했지만 그리스 본토와 멀리 떨어진 이 섬은 투르크 제국과 훨씬 가까웠고, 병력도 미미했으며 전쟁 경험도 없었다. 참전은 섬 전체의 참화로 귀결될 공산이 컸다. 마침내 그가 내린 결정은 신중하고 실용적인 것이었다. 돈과 물자는 지원하지만 병사를 제공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1821년 3월 실제로 전쟁이 발발하자 많은 키프로스 청년들이 전쟁에 참가하기 위해 키프로스를 떠났다. 이 지역을 통치하던 투르크 고위 관리 메메트가 격노했다. 그는 병력을 보강하여 키프로스인들의 무기를 압수하고 중요 인사들을 체포했다. 키프리아노스에게는 추방령이 내려졌다. 그러나 사태가 악화됨에도 그는 섬을 떠나지 않았다.

조한욱 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 교수
조한욱 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 교수
1821년 7월9일 메메트는 니코시아시의 대문을 걸어 잠그고 470명의 중요 시민들을 교수형이나 참수형에 처했다. 키프리아노스 대주교는 키프로스 왕궁 건너편에 있는 나무에서 공개적으로 교수형에 처해졌다. 다른 도시를 관할하던 세 명의 주교도 같은 길을 갔다.

조한욱 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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