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3 총선의 후폭풍이 거세다. 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당의 지지율이 최저로 떨어진 것을 넘어서 새로운 정치 지형이 만들어지는 모양새다. ‘2016년 체제’의 시작이라고 할 만하다.
“보수세력의 지혜 상실과 과도한 극단주의는 역설적으로 의도하지 않은 역사 진보를 불러왔다.”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정국에서 치러진 17대 총선과 관련해 한 정치학자가 한 말이다. 이번 20대 총선에 대해서도 타당한 평가다. 당시 선거에서 열린우리당은 전체 299석 가운데 152석을 차지했고, 진보정당인 민주노동당이 처음으로 두 자릿수인 10석을 가져갔다. 1987년 민주화 다음 해에 치러진 13대 총선 이래 비보수 정당이 이긴 것은 이번 총선을 제외하면 그때뿐이다.
17대 총선은 중대선거(critical election)로 불렸다. 기존 정치 지형을 뒤흔들어 새 구조의 계기가 되는 선거라는 뜻이다. 나아가 새 지형의 틀을 만드는 선거는 정초선거(founding election)라고 한다. 당시까지 유지된 지형은 1988년 총선을 뿌리로 한다. 결과는 299석 가운데 민주정의당 125석, 평화민주당 70석, 통일민주당 59석, 신민주공화당 35석이라는 ‘보스(1노3김) 주도 지역분할’ 구도였다. 이른바 ‘1987년 체제’가 87년 대선과 이 선거로 구체화했다.
중대선거 다음에 정초선거가 이어지는 건 역사의 순리다. 하지만 17대 총선 이후에는 그렇지가 못했다. 2007년 대선과 2008·12년 총선, 2012년 대선 결과는 이전 패턴과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연이어 집권한 이명박·박근혜 정권 또한 낡은 모습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런데 17대 총선 이후 무려 12년 만에 정초선거라고 해도 좋을 선거가 이번에 이뤄졌다. 이를 ‘역사의 지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총선은 5·16 쿠데타 이후 우리나라 정치의 주된 특징이자 87년 체제에서도 온존된 지역주의, 권위주의, 정치 불신(또는 만능)을 모두 심판했다는 점에서 정초선거로서 자격이 있다.
권위주의 거부는 이번 선거의 고갱이다. 대통령의 파시즘적 권위주의, 여야 지도부의 독선적 권위주의, 작은 이익에 갇혀 유권자와 멀어진 다수 정치인의 퇴행적 권위주의가 모두 철퇴를 맞았다. 그간 권위주의의 유력한 수단이었던 ‘북한 카드’와 성장 이데올로기도 이번 선거에선 무력했다. 형식은 갖췄으나 실질적으로 뿌리내리지 못한 민주주의에 대한 염원이 투표 결과에 담겨 있다. 젊은층의 투표율이 높아진 것은 더 물러설 곳이 없다는 절박함의 표현이기도 하다.
지역주의의 규정력도 현저하게 약해졌다. 정당투표 결과를 시·도별로 보면 특정 정당에 50% 이상의 표를 몰아준 지역은 세 곳에 그친다. 새누리당이 각각 58.1%와 53.1%를 차지한 대구·경북과 국민의당이 53.3%를 얻은 광주뿐이다. 신생 국민의당이 광주·전남·전북의 28석 가운데 23석을 차지한 것은 지역주의를 넘어서는 움직임이다. 새로운 미래를 위해서는 어떤 선택도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더불어민주당이 부산·경남에서 8석이나 얻은 것도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다.
역설적으로 이번 선거에 가장 크게 기여한 사람은 박근혜 대통령이다. 그는 권위주의의 극한을 보여줬고, 일관되게 지역주의에 기댔으며, 정치 불신을 노골적으로 부추겼다. 기존 체제의 모순을 밑바닥까지 드러낸 것이다. 그럼으로써 그는 유권자들의 올바른 선택을 끌어내는 데 기여했다.
21세기 들어서도 과거의 부정적 동력을 바탕으로 명맥을 이어가던 구시대가 마침내 막바지에 이르렀다. 이제 국민은 기존 체제를 반면교사로 삼아 새 미래를 희망한다. 하지만 새 체제는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는다. 이번 선거는 낡은 정치 지형을 거부했으나 대체할 새 체제의 모습은 명확하게 보여주지 않았다. 책임의 정치, 타협의 정치라는 막연한 말만으로는 부족하다. 지체된 만큼 서둘러 2016년 체제의 내용을 채워가야 한다.
김지석 논설위원 jkim@hani.co.kr
김지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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